교황 식스토 5세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식스토 5세 | ||||||||||||||
|
교황 식스토 5세(라틴어: Sixtus PP. V, 이탈리아어: Papa Sisto V)는 제227대 로마 교황(재위: 1585년 4월 24일 - 1590년 8월 27일)이다. 세속명은 펠리체 페레티(이탈리아어: Felice Peretti)이다.
[편집] 생애
1520년 12월 13일 이탈리아 안토나의 마르케의 몬탈토 근처 그로탐마레에서 태어났다. 12세에 프란체스코회에 입회하여 1547년에 신부가 된 후 페르모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훌륭한 설교가로 명성이 높았으며 종교 재판에 관여하였다. 1570년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추기경이 되었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레고리오 13세가 선종하자 추기경단이 분열되어 일치되지 않았다. 펠리체는 후보자들 중 중립적인 인물이어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식스토 5세로 명명하였다.
온화한 성품과는 거리가 멀었던 식스토 5세는 교황권을 양날의 칼처럼 교황령 안에서 일어난 여러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시켰다. 그는 도적 떼와 그들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귀족들을 수천 명씩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이처럼 초강력 수단을 동원하여 혼란한 정국을 대강 정리한 뒤 산적했던 다른 문제들도 차례대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경제, 산업, 종교 등 하나같이 까다로운 과제들에 면밀하고 식을 줄 모르는 관심을 기울였다.
식스토 5세는 교회 쇄신을 목표로 성직자들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신이 전 교회에 두루 미치게 하였다. 1585년 12월 20일 칙서를 발표하여 모든 주교들이 교황청을 방문하여 교구의 업무를 보고하게 하였다(Ad Limina). 식스토 5세는 추기경의 숫자를 70명으로 제한하고 그들에 관한 규정을 정하였다.(Postaquam Verus) 이 규정 가운데 일부는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 1588년에는 교황청에 15개의 성(congregatio)을 두어 추기경이 장관이 되어 교황청의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Immensa Aeterni Deus).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교황청 구조의 전신이 되었다.
식스토 5세는 프란체스코회를 편애하여 그 수도회 출신인 사람들을 대거 공직에 임명하였다. 은총에 관하여 예수회와 도미니코회 사이에서 제기된 논쟁에 대해서는 쌍방이 침묵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식스토 5세는 선교에도 많은 열성을 보여 청나라, 일본, 필리핀, 아메리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식스토 5세는 프랑스에 개신교가 확산되지 않도록 프랑스와 제휴하고 유럽의 정치적인 균형을 원하여 에스파냐가 주도권을 잡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예술과 학문을 숭상하여 라테란 궁전을 비롯하여 퀴리날레 궁정을 증축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두오모를 완성시켰으며 로마 대학교를 많이 지원하였다.
그 결과 교황령은 훨씬 안정되었고 새로운 일자리들이 생겨났으며 적자였던 교황청의 금고가 다시 가득 찼고 로마를 르네상스풍 도시에서 바로크풍 도시로 바꾸기 위한 대규모 도시 계획이 추진되었다. 식스토 5세가 교황직을 어떤 자세로 수행했는지는 종종 인용되는 “군주는 일하다가 죽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서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편 유명한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가 아직 수사였던 시절의 그에게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물론 그가 예언대로 교황이 된 것은 노스트라다무스가 죽은 후의 일이었다.
전 임 그레고리오 13세 |
제227대 교황 1585년 4월 24일 - 1590년 8월 27일 |
후 임 우르바노 7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