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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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9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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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9세(라틴어: Beatus Pius PP. IX, 이탈리아어: Papa Pio IX)는 제255대 로마 교황(재위: 1846년 6월 16일 ~ 1878년 2월 7일)이다. 세속명은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 페레티(Giovanni Maria Mastai-Ferretti)이다.
[편집] 생애
1792년 5월 13일 이탈리아의 아드리아 해변에 위치한 작은 도시 세니갈리아에서 출생하였다. 간질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치료되어 콜레지오 로마노에서 수학한 후 1819년 4월 1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영성에 심취하여 예수회에 입회할 결심을 세우기도 하였다. 로마 고아원에서 사제 생활을 하던 중 교황청 사절을 따라 칠레와 페루를 순방하여 선교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로마에 돌아간 후 호스피스 일을 하던 중 스폴레토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다음 1840년 이몰라의 교구장으로 전보된 후 추기경이 되었다. 1846년 6월 16일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9세로 명명하였다.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그의 선출을 환영하였다.
비오 9세는 그 당시 사방에서 쏟아지는 자유로운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는 1846년 7월 17일 사면 교령에 서명하여 감옥문을 열고 국무성정 장관으로 지치 추기경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고문으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 조반니 코르볼리 부시 주교를 임명하고 라므네의 제자였던 벤투라 신부에게 호의를 보였다. 이런 일련의 태도는 비오 9세의 자유주의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1846년 11월 9일 칙서 Qui pluribus를 통해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단죄한 자유주의에 대하여 근본적인 원리들을 갱신하였다. 유럽의 모든 자유주의자들은 비오 9세를 칭송하였다. 1847년 10월 오스만 제국과 협성을 하여 예루살렘에서 라틴계 총대주교좌를 세울 수 있었다. 러시아 제국과 정교 협정을 맺고 이탈리아에서 비오 9세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비오 9세는 교황청의 영적인 독립을 주장하여 교황령을 헌법 정부로 만들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반대하였다. 정치적인 미숙함과 경제적인 위기는 비오 9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교황령 총리 로시가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사살되자 비오 9세는 1848년 11월 24일 나폴리 왕국의 가에타로 피신하였다. 곧 마치니와 그의 추종자들은 로마 공화국을 선언하였으나 비오 9세는 프랑스 원정군의 도움으로 1850년 4월 12일 로마로 귀환하였다. 교황권은 다소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비오 9세는 프랑스 혁명과 로마의 독립 운동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전통적인 사회와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교황령의 행정은 국무성성 장관 안토넬리 추기경이 도맡았다. 한편 카보우르는 이탈리아 내의 자유로운 정책 실현과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 피에몬테 정부의 패권 장악과 이탈리아 전 영토에 대한 국가 통일을 쟁취하고자 우선적으로 민주적 통합론자와 영국 등 반(反)교황청 세력과 밀착하여 교황령을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하려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교황청과 맞서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의 병합을 위해 정교 분리 이론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교황청은 세속적 지배권을 이탈리아 왕국에 양도하는 대신 이탈리아 왕국 영토 내의 독립적 존재로서 종교적 사명에 대한 자유로운 활동을 교황청에게 보장해 주고 왕국에서 교황청에 연금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교황청과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비오 9세는 반대하였다. 한편 이탈리아 정부는 수도원 제도의 병폐를 비난하면서 교회 행정에 계속해서 관여하였고 1866년 7월에는 수도원 해산에 관한 법률, 종교 단체 재산의 국유화, 성직자들의 재산 몰수와 매각 등에 관해 교황청과 교섭하고자 하였다.
비오 9세는 1864년 12월 8일 칙서 Ouanta cura에 덧붙인 오류표(syllabus errorum)로 근대적인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실증주의, 사회주의를 맹렬히 규탄하면서 정부와의 협력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독립군은 1859년에는 롬바르디아를, 1866년에는 사르데냐 왕국과 나폴리 왕국을, 1870년에는 교황령을 침공하여 함락시켰다. 그리고 통일 이탈리아 왕국은 수도를 로마로 정하고 교황청의 세속권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정치 권력이 완전히 소멸된 교황은 2천년 전 자신의 ‘근원지’로 돌아왔고, 비오 9세는 (교황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티칸의 수인(囚人)’이 되었다. 그러는 중에 1869년 12월과 1870년 여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고 교황의 무류지권을 선언하여 개혁의 물결로부터 가톨릭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교리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결정을 내렸다. 한편 1870년 로마를 점령한 이탈리아는 교황의 세속 주권은 실제적으로 종식되었으나 1871년 5월 13일에 교황 보장법을 승인하고 이탈리아 영토 안에서 교황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였다.
비오 9세는 이런 와중에서도 에스파냐, 오스트리아, 그리고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과 정교 협정을 맺었다. 독일 제국과의 우호 관계는 한동안 지속되다가 1870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교황의 무류성이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문화투쟁을 전개하자 독일 가톨릭교회가 큰 피해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1872년에는 예수회를 비롯하여 여러 수도회가 추방되고 신학교와 기숙사가 폐쇄되는 등 가톨릭교회 활동을 구속하는 여러 법령이 제정되었다. 한편 비오 9세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 교계 제도를 재개하고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에 206개의 새로운 교구와 대리구를 세웠다. 교황청의 노력으로 선교 활동은 대단히 활발해졌다.
비오 9세는 1878년 2월 7일에 선종하였다. 그의 시복 조사는 1907년 2월 11일 교황 비오 10세 아래 시작되어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복자로 시복되었다.
전 임 그레고리오 16세 |
제255대 교황 1846년 6월 16일 ~ 1878년 2월 7일 |
후 임 레오 13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