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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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崔益鉉, 1833년 12월 5일~1906년 11월 5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을사조약에 저항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경주, 아호는 면암(勉庵)이다.
[편집] 생애
철종 재위 중인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과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근무했다. 그는 언관 벼슬에 주로 있으면서 일찌감치 조선조 사림의 최대 미덕인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다.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는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반대하여 관직을 빼앗기기도 했다.
어려서 아버지의 도움으로 즉위한 고종이 성인이 되면서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여기에는 부인인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척족 세력들이 가담했다. 대원군을 비판했던 최익현은 동부승지로 기용되어 반 흥선대원군파의 첨병에 서게된다.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는 등 그를 공격하여 결국 대원군을 실각시켰다. 그는 임금의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는 형벌을 받았으나 이는 실권을 잡은 민씨 세력의 형식적인 처벌이었다.
그러나 최익현은 곧 외국과의 통상을 논의하기 시작한 민씨 정권과도 곧 마찰을 빚었다. 일본과의 통상 조약 체결을 극렬 반대하다가 이번에는 흑산도에 위리안치된 것이다.
이후로 통상 확대와 여러 외세의 유입이 계속되면서 최익현은 이에 결사 저항하는 위정척사론의 거두로 활동하게 된다.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운동과 그해 친일 정권 성립과 함께 단행된 갑오개혁에 크게 반발했고, 이듬해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조직했다가 체포되었다. 이 당시 그가 상소를 올리며 적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는 말은 강제적 단발령에 목숨을 걸고 반발했던 당시 유학자들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는 구절이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단식을 하는 등 끝까지 저항하다가 4개월 만에 사망했다.[2]
문집으로는 《면암집》이 있다.
[편집] 참고자료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이 달의 독립 운동가 상세자료 - 최익현, 1993년
[편집] 주석
- ↑ 《동아일보》 새로 쓰는 선비론 (21) - 면암 최익현 (1998.3.5)
- ↑ 《동아일보》 새로 쓰는 선비론 (21) - 勉庵 최익현의 순국 (1998.3.5)
- ↑ 예산군청, 최익현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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