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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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李山海, 1539년~1609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내자시정(內資寺正)이다.[1]
조선시대 문종 때부터 광해군 때까지 벼슬을 한 조선시대 문신으로 선조때 영의정을 비롯해 여러 관직을 거친 당대의 세도가이자 문장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산해는 6세 때 이미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15세가 되기도 전에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장원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이 이산해를 우러러 봤으며, 그 사람됨이 순후(醇厚)하고 숙성하여 얻기 어려운 선비라는 말을 들었다. 문장이 매우 뛰어나 선조대 8문장가의 한 명으로 칭송되며 나라에 그 문명을 날렸으며, 서화에도 능하여 대자와 산수묵도에 뛰어났다. 초시를 거쳐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21살 때는 문종에게 그 학문의 뛰어남을 인정받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될 정도로 그의 학문적 역량이 뛰어났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정철의 치죄 문제와 전랑 천거 문제 등을 놓고 동인 세력간 대립하여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우성전(禹性傳)과 이산해가 대립하게 되면서 유성룡은 우성전의 편을 들어 남인이 되고, 이산해와 이발(李潑)은 북인이 되었다. 후에 북인은 선조 뒤를 이을 임금 자리를 놓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지는데 이산해는 대북의 편에 섰다.
[편집] 사초에 나타난 이산해에 대한 평가
사초에 나타난 이산해에 대한 평가는 모두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자주 역적 또는 간신등으로 표현되고 있어 매우 부정적이다.[2] 그가 관직에 등용되면 바로 따라서 그를 파직하라는 상소가 항상 있었다.[3] 이산해가 6살때부터 천재로 추앙 받을 정도로 영특했고 관직에 나선 것도 23세로 상당히 빠른 편이였으며 당대의 문장가로 손꼽혔으며 서화에도 그 재능을 보였고 훌륭한 면이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4][5][6][7] 《선조실록》 이후에서 이런 나쁜 평가만을 받는 것은 임진왜란 전후 그리고 선조 말기에 이산해가 파행적 정치 행보를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8]
사초에 나타난 평가가 가혹했고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많았음에도 이산해는 분명히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임진왜란 전의 영의정으로서 분명히 일본의 침입을 경계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도 선조 말기에 다시 영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공신의 반열에 오르고 선조 34년에는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으로 책봉되기까지 했다. 이산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해군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모든 치상에 관한 일들을 현임 대신의 예에 따라 할 것을 해조에 말하라.”라고 말하며 후하게 장례까지 치러줄 것을 지시한 것으로 보아 광해군의 신임까지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 이산해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좀더 연구가 되어야 한다.
[편집] 연보
- 중종 39년(1539년) 태어남
- 명종 13년(1558년) 20세에 진사시에 합격
- 명종 15년(1560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됨
- 명종 16년(1561년) 23세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
- 명종 17년(1562년) 홍문관 정자와 부수찬이 됨
- 명종 19년(1564년) 사간원 정언이 됨
- 명종 20년(1565년) 이조 좌랑이 됨
- 명종 22년(1567년) 원접사 종사관으로 명나라 조사를 맞이한 뒤 홍문관 교리가 됨
- 선조 1년(1567년) 이조 정랑이 됨
- 선조 3년(1570년) 32세에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고 구황 적간 어사(救荒摘奸御史)에 임명되어 파견 나감
- 선조 4년(1571년) 사간원 대사간이 됨
- 선조 5년(1572년) 이조 참의가 됨
- 선조 8년(1575년) 대사간이 다시 됨
- 선조 12년(1579년) 대사간으로서 서인 윤두수, 윤근수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킴
- 선조 13년(1580년) 형조 판서가 됨
- 선조 14년(1581년) 43세에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고 이조 판서가 됨
- 선조 17년(1584년) 홍문관 대제학이 됨
- 선조 18년(1585년) 좌찬성(左贊成)에 오름
- 선조 21년(1588년) 우의정에 오름
- 선조 22년(1589년) 비변사의 불차 채용(不次採用)에 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였고, 좌의정에 오름
- 선조 23년(1590년) 영의정에 오름
- 선조 25년(1592년) 54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파천을 주장하였다가 삭탈 관직되었음. 파면되어 평양에 이르렀을 때, 다시 탄핵을 받아 평해에 중도부처됨
- 선조 28년(1595년) 풀려나 직첩을 되돌려받음.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홍문관 및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탄핵되었음
- 선조 33년(1600년) 62세에 다시 영의정이 됨
- 선조 34년(1601년)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짐
- 광해 1년(1609년) 8월 23일에 죽음.
[편집] 참고 문헌
- 《조선왕조실록》
-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 《광해군일기》 3권, 즉위년(1608 무신 / 명 만력(萬曆) 36년) 4월 27일(계미) 7번째 기사.
- ↑ 《선조실록》 138권 34년 6월 5일 (신미) 2번째 기사.
- ↑ 《선조실록》 138권 34년 6월 5일 (신미) 2번째 기사.
- ↑ 《명종실록》 28권, 17년(1562 임술 / 명 가정(嘉靖) 41년) 3월 5일(기축) 2번째 기사.
- ↑ 《명종실록》 29권, 18년(1563 계해 / 명 가정(嘉靖) 42년) 10월 1일(병오) 2번째 기사.
- ↑ 《명종실록》 26권, 15년(1560 경신 / 명 가정(嘉靖) 39년) 4월 24일(기미) 1번째 기사.
- ↑ 《광해군일기》 3권, 즉위년(1608 무신 / 명 만력(萬曆) 36년) 4월 27일(계미) 7번째 기사.
- ↑ 《광해군일기》 19권, 1년(1609 기유 / 명 만력(萬曆) 37년) 8월 23일(신미) 4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