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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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수(尹斗壽, 1533년~1601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이며, 서인(西人)의 일원이다.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본관은 해평(海平),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윤근수의 형이다. 문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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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1555년과 1558년에 각각 생원시(生員試)와 문과 별시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1] 승문원에서 일하게 되어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등의 직위를 지냈다.
1575년 이종 동생 이수(李銖)의 옥사에 동생 윤근수와 함께 연좌되어 파직당했다.
1579년 다시 기용되어 연안부사(延安府使), 전라도관찰사(通政大夫守全羅道觀察使), 평안감사(平安監司), 형조판서(刑曹判書), 대사헌, 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지냈다.
1591년 왕세자 책봉 문제로 벌어진 동인과 서인 간의 당파싸움인 건저문제(建儲問題)로 누명을 받아 동생과 함께 삭탈관직되어 회령으로 유배를 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피난가는 선조를 호송하여 어영대장(御營大將)과 우의정, 좌의정으로 연달아 승진하여 국난 극복에 주력하게 된다. 이때 그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자는 주장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며 조선만의 힘으로도 능히 일본의 침공을 저지할 수 있다며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과 개성을 연달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한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평양을 사수하려 했으나 패하고 만다. 평양성 전투에서의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 요청을 전달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윤두수는 급히 쫓아 와 선조의 말고삐를 잡고 ‘필부의 경솔한 행동’이라며 극언을 서슴치 않으며 부디 망명 요청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듬해에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를 겸하게 되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7년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다.
[편집] 주요 저서
- 《오음유고》(梧陰遺稿)
- 《기자지》(箕子誌)
[편집] 가족 사항
- 아버지: 윤변(尹忭)
- 할아버지: 윤희림(尹希琳)
- 증조부: 윤계정(尹繼丁)
- 외조부: 현윤명(玄允明)
- 처부(妻父): 황대용(黃大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