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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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 (심양, 중국어 간체: 沈阳, 정체: 瀋陽, 병음: Shěnyáng)은 중국 랴오닝 성의 성도이다. 봉천(奉天)은 선양의 옛 이름이다. 국가역사문화명성 (国家歴史文化名城)에 선정된 관광 도시이기도 하다. 만주족은 무크덴 (Mukde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목차 |
[편집] 주의!
- (청나라) 봉천성과 (중일전쟁시의) 봉천시를 구분하여야 한다.
- 봉천시는 현재의 선양시가 청나라와 일제시대에 불리웠던 옛 이름이다.
- 봉천성 (省)은 청나라 의 행정 구역이며, 현재는 개편을 통해 랴오닝 성과 지린 성으로 개편,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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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奉天省: 지금의 랴오닝성과 지린성의 동남부에 해당한다)
[편집] 인구와 면적
- 인구: 약 693만 명. (2006)
- 면적: 1만 3천 평방미터.
[편집] 소수 민족
선양은 36개의 소수 민족이 거주하며 한족이 91.26%를 차지한다. 36개의 소수 민족은 만주족 (滿族), 조선족{朝鮮族), 후이족 (回族), 시버족 (錫伯族), 몽골족 (蒙古族), 좡족 (壯族), 먀오족 (苗族), 투자족 (土家族), 둥족 (侗族), 다우르족 (達斡爾族), 바이족 (白族), 위구르족 (維吾爾族), 티베트인 (藏族), 이족 (彝族), 고산족 (高山族), 서족 (畲族), 부예이족 (布依族), 야오족 (瑶族), 아카족 (哈尼族), 카자흐족 (哈薩克族), 다이족 (傣族), 리족 (黎族), 수이족 (水族), 나흐족 (納西族), 징포족 (景頗族), 키르기스족 (柯爾克孜族), 투족 (土族), 물라오족 (仫佬族), 창족 (羌族) 마오난족 (毛南族), 거라오족 (仡佬族), 러시아인 (俄羅斯族), 예벤키인 (鄂温克族), 타타르족 (塔塔爾族), 오로첸족 (鄂倫春族), 나나이족 (赫哲族), 로바족 (珞巴族)이 거주하고 있다[1].
[편집] 광역 행정 구역
- 시구(市区): 신해 구(沈河区), 황구 구(皇姑区), 해평 구(和平区), 대동 구(大東区), 톄시 구(鉄西区), 소가톤 구(蘇家屯区), 동릉 구(東陵区), 선베이 구(瀋北新区), 우훙 구(于洪区)
- 현급시(縣級市): 신민시(新民市)
- 현(縣):파쿠 현(法庫縣), 료중 현(遼中縣), 캉핑 현(康平縣)
[편집] 군사
중국인민해방국의 7대 군구 (軍区)의 하나인 선양군구사령부가 있다.
[편집] 교통
[편집] 경제
[편집] 관광
[편집] 교육
- 東北大学
- 遼寧大学
- 中国医科大学
- 瀋陽工業大学
- 瀋陽薬科大学
- 瀋陽理工大学
- 瀋陽大学
- 瀋陽建築大学
- 瀋陽農業大学
- 魯迅美術学院
- 瀋陽航空工業学院
- 瀋陽化工学院
- 中国刑警学院
- 瀋陽音楽学院
- 瀋陽師範大学
- 遼寧中医学院
[편집] 선양시의 "펑톈" 개명 역사
- 1657년 청나라가 심양(瀋陽)에 봉천부(府)를 설치하면서 심양을 공식 지명 "봉천"으로 개명하었다.
- 라오닝의 선양시 지역은 한나라 이전부터 북방 민족들의 지역이었으며, 개모성이 있던 고구려(高句麗)의 영토였다가 신라의 나당연합 통일 전쟁이후 당(唐)의 영향아래 잠시 심주(瀋州)로 불리었다. 그 후 발해(渤海)에 속했다가 요(遼), 금(金)시대에는 동경로(東京路), 원대에는 심양로(瀋陽路)가 설치되었으며, 이 후 명나라가 이 곳에 심양위(瀋陽衛)를 두었다. 그러므로 선양 (瀋陽 심양)이라는 이름은 원대의 작명과 명대의 개칭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행정적인 지명과는 별도로 원주민인 만주족은 "무크덴"이라는 지명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 1625년 청나라는 랴오양 (遼陽)에서 선양으로 천도하면서 선양을 성경(盛京)이라 개칭하였다.
- 1644년 베이징을 수도로 정한 후에는 선양을 배도(陪都)로 삼았다.
- 1911년 봉천은 (봉천의 군벌이라는 뜻인) 봉계군벌 (奉系軍閥의 수부 (지휘부가 있는 주둔지)로 되었다.
- 1923년 봉천현에서 봉천시(市)로 개정되었다.
- 1929년 장학량은 봉천시를 심양시로 다시 고치었다.
- 1931년 일본이 “9.18"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심양을 강점한다. (중일전쟁 시발점).
- 1932년 만주국이 성립되고 일제에 의하여 봉천으로 다시 개명되었다.
- 1945년 2차 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난 후 봉천시는 선양시 (瀋陽市 심양시)로 공식 행정 지명을 환원했다.
- 1953년 중앙직할시로 되었다.
[편집] 북방 지역의 알자스
선양-펑톈 등의 지명 변화는 마치 유럽 알자스 지방의 역사나 정치적 사항과 유사한 점이 있다.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봉천"은 1657년 청조가 명나라 지명인 심양 (瀋陽)을 봉천으로 개명한 것이다. 또한 1929년에 한족의 군벌 장쉐량이 모처럼 선양으로 회복하었으나,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9.18 사변)으로 선양을 강점한 후 다시 봉천으로 개명하였다. 특히 한족의 입장에서는, 일제 강점에 의한 봉천이라는 환원은 치욕이라고 보는 듯하다,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봉천"이라는 지명은 외세의 영향으로 두 번이나 외세에 의하여 개명되었던 호칭인 셈이다. 대부분의 한족들이 만주사변을 "918 사변"이라고도 부르며 9월 18일을 국치일로 생각한다. 비록 실제로는 "심양"이라는 이름조차도 그 어원은 한족이 아닌 원(元)나라의 지명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로 "심양"이라고 불려오다가 만주족의 청나라가 "봉천"이라고 개명한 후, 일제 조차도 "봉천"이라고 불렀기에 현대의 중국은 "봉천"이라는 (외세가 작명한) 지명에 감정적으로 우호적이지 못한 면이 강하다.
그러나, 장쉐량이 1929년에 봉천을 심양으로 개명한 실제적 이유를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다. 장제스의 국민당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내새운 초기 삼민주의 강령에는 "만주족 축출"이 포함되어 있는 등 당시의 중국 내부의 혁명은 소수 민족을 배제한 한족 중심의 혁명이었다. 또한 실제적으로 그 기원이 청나라의 군대였다는 태생적 약점을 가지고 있던 한족 봉계 군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 군벌이 만주족의 태생적 기원을 버리고 바야흐로 "한족"의 세력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만주족의 "봉천"을 한족의 "심양"이라는 지명으로 정치적 필요상 "복귀"시킨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더욱이 심양이든 봉천이든, 실제적으로는 청나라가 들어서기 이전까지는 "장성 밖 지역"으로 간단히 치부되어었으며 토착민인 만주족은 "무크덴"이라고 하며 행정 구역상의 지명과는 별도로 불려오던 곳이고, 비록 명나라가 "심양"이라고 지칭하기는 하였으나 토착민들은 이에 상관 없이 고유의 지명으로 불러오던 곳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토착민이자 도시 건설자였던 만주족과 여타 북방 민족의 입장에서 보는 이러한 한족 중심 사고는 지역 사회의 역사적 근본을 교묘히 바꿔버리는 책략의 일환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봉천에서 살아온 북방 민족의 입장에서보면 입장은 반대가 된다. 요동 지역은 원래 한족의 지역이 아닌 북방 민족의 땅이었으며, 몽고족이 "심양"이라고 지명하고 만주족이 "무크덴(Mukden)"이라고 부르던 곳을 1600년 대 이후로 행정상의 편의로서 봉천이라고 공식 표기하여서 20세기 초까지 사용하여 온 것이다. 실제로 1929년에 봉천이 심양으로 개명되었을 때에 많은 만주족은 분개하였으나, 군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한족 군벌들에게 눌려서 탄압을 받았을 뿐이었다고 한다. 이후 일제가 만주국을 건설한 후 만주족의 땅이라는 의미로 한족의 "심양"을 다시 만주국 "봉천"으로 개명한 정치적인 사건은 만주족이나 북방민족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양을 봉천으로 개명한 일은 비록 그 주체가 일제라 하더라도, 한족에게 탄압과 압력을 받던 만주족과 기타 소수 민족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던 작은 사건이었다.
실제로 전통적으로는 "장성 밖의 지역"이라고 보아야 할 이 곳의 지명을 군벌과 공산당 정부가 (무크덴이라는 토착 지명이 존재하며, 원나라의 지명이 기원이라는 것을 크게 밝히지 않고, 단지 명나라 당시에는 한족들끼리만 통용되던 장성 밖 지역의 제한적 행정 지명이라는 것을 덮어두면서) 구태여 명나라 지명으로 바꾼 것은, 토착 세력을 견제하면서 현재의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 한족계열의 중국인이라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편집] 독립군의 펑톈과 만주국의 펑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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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일제 시대에 한국인들이 많이 진출한 바, 한국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만주 봉천’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대에는 봉천이라는 지명보다는 선양이라는 지명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1924년에 독립군 삼부 중의 하나인 정의부가 지린과 봉천(성?)을 중심으로 형성되기도 하였다. 수많은 독립 지사가 망명하여 활동했던 곳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한족의 입장에서 보는 봉천(시)이라는 지명은 9.18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도시명이며, 실제적으로도 봉천은 독립 지사들만의 도시가 아니라, 만주국 봉천군관학교가 있었던 일제 시대의 주요 거점 도시였다.
한국인의 경우에는 ‘만주 봉천’이 독립 지사들이 많이 활동하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자주 쓰이는, 오히려 ‘선양(심양)’보다 친숙하고 우호적이기까지 한 지명일 수 있다. 그러나 ‘봉천’은 중국, 특히 한족의 입장에서는 선양이 ‘일제 만주국의 봉천’으로 강점되었던 치욕의 지명이므로, 옛 청나라나 20세기 초반의 역사를 논하면서 필요상 정확한 지명을 거론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봉천’ 보다는 현재의 지명인 ‘선양’을 사용할 것을 권한다.
[편집] 주석
[편집] 바깥 고리
- (한국어) 심양시 공식 홈페이지
- (한국어) 주 선양 대한민국 총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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