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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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 기간 : 1933년 - 194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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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총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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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Horst-Wessel-Lied | |||||
수도 | 베를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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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어 | 독일어 | ||||
정부 형태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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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독재 아돌프 히틀러 (1933~1945) 카를 되니츠(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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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 건국 • 종말 |
1933년 2월 27일 1945년 5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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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
633,786 km² 2.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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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1937년 어림 • 인구 밀도 |
69,314,000명 109.4명/km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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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 라이히스마르크 |
나치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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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조직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역사 속 나치 초기 나치 연표 나치 개념 제3제국 용어 '독일 외 나치 정당 및 운동 캐나다 민족 사회주의 통일당 나치 우생학 나치 우생학 관련 주제 나치즘과 종교 관련 목록 나치당 지도자 및 당관료들 |
나치 독일(독일어: Zeit des Nationalsozialismus)은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 당, NSDAP)과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의 독일을 가리킨다. 히로히토 치하의 일본 제국과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 추축국이 되었고, 그 후 패전국이 되었다.
목차 |
[편집] 국명
정식 국명은 대독일제국(독일어: Großdeutsches Reich)이나 흔히 제3제국(독일어: Drittes Reich)을 사용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과 독일 제국을 이어받았다는 의미로 제3제국을 선전용으로 사용했지만, 대항 세력이나 적국 측에게 역이용되어 정부에서는 이 선전 용어의 사용을 금지했다. 어째서 제3제국이라고 불렸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기 때문이다.
- 신성 로마 제국 (962~1806),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 독일 제국 (1871~1918), Deutsches Kaiserreich
- 제3제국 (1933~1945), Drittes Reich
[편집] 정치
[편집] 일당독재체제
- 1932년, 나치는 2번의 국회 선거에서 최대 득표를 얻었지만, 의회에 대해 단독으로는 절대 다수를 획득할 수 없었다.
- 1933년 1월 30일, 주위로부터 설득당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쿠르트 폰 슐라이허를 대신해 아돌프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 1933년 2월 27일, 국회 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히틀러는 긴급 대통령령을 포고해 비상 사태를 선언,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에 따라 성립된 기본적 인권이나 노동자의 권리의 대부분을 정지시켰다. 네덜란드인 공산당원 판 데어 루페를 방화법으로 체포, 독일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개시했다.
- 1933년 3월 5일, 총선거에서 공산당이 크게 후퇴한 반면, 나치는 43.9%의 득표를 얻었다.
- 1933년 3월 12일, 새 국기를 제정할 때까지 검은색·하얀색·붉은색의 구 독일 제국의 국기와 나치당 깃발인 하켄크로이츠(Hakkenkreuz) 양쪽 모두를 내걸기로 결정했다.
- 1933년 3월 23일, 히틀러는 의회에서 수권법(전권 위임법)을 성립시켜, 의회로부터 입법권을 채택해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 1933년 4월 26일, 비밀경찰인 게슈타포를 설치, 비판자나 반대자가 나치에 보고되어 나치가 직접 독일 사회를 컨트롤한다. 많은 나치의 정적, 특히 공산당 및 사민당원이 정치범으로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 1934년 1월 30일, 국가 재건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지방자치국가였던 독일을 일원적인 중앙집권국가로 변모시켰다. 주 의회가 해산되어 주 정부 장관(Reichsstatthalter)으로서 나치당 간부가 파견되었다.
-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수상인 아돌프 히틀러가 국가원수인 대통령직을 겸무하여, 독재자로서 전권을 담당하게 된다.
[편집] 경제 정책
당시 독일은 천문학적 인플레이션과 1929년 경제 대공황의 여파를 받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실업자로 전락하는 경제 위기에 직면하여, 당시의 정부는 뚜렷한 타개책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권을 잡은 나치는 경제 정책을 독일 국립 은행 총재와 경제 장관을 겸임한 햘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에게 위임하였다. 소비재의 수입 제한과 수출 증가를 도모하기 위해 독일 국립 은행은 고액의 융자를 산업계와 개인에게 주었다.
또 군수상 프리츠 토트(Fritz Todt) 아래, 미국의 뉴딜 정책을 모방하여, 대규모 공공 사업을 계획하여 다임러 크라이슬러(Daimler-Chrysler)나 크루프(Krupp), 빌리 메서슈미트(Willy Messerschmitt) 등 군수 산업의 확대와 아우토반의 부설 등이 행해졌다.
1935년에는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여, 독일 재군비 선언을 실시하였다. 불과 10만 명으로 제안되었던 병력이 급속히 확장되었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독일에서는 흘러넘치던 실업자들이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공공 사업은 유럽의 도처에 연료 창고, 지하 기지 설비 및 참호의 구축 등으로 행해졌다.
[편집] 사회 정책
나치 정권은 인종주의 정책을 펼쳐, 아리아 인종의 우수함을 강조하였으며 인종적·사회적·문화적 청정을 요구하며 사회의 모든 요소의 정치적 지배를 실시하였다. 또 추상 미술 및 전위 예술은 박물관에서 내쫓겨져 ‘퇴폐 예술’로 조롱당하였다.
나치 독일은 정적인 독일인, 유대인, 집시와 같은 소수 민족, 동성애자나 장애인 등 그들의 가치관으로 보았을 때 불결하다고 여긴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을 통해서 그 목적을 추구하였다.
1933년에 성립한 단종법 아래, 나치 독일은 정신 장애인이나 알코올 중독환자를 포함한 유전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 40만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1940년에는 T4 안락사 계획에 의해 몇 천 명의 장애인들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독일의 지배 민족으로서의 청정을 유지한다”라는 나치의 선전으로 기술되었다. T4 작전은 공식적으로는 1941년에 중지 명령이 내려졌지만, 이러한 정책은 훗날 대량 학살에 결합되었다.
1935년에 제정된 뉘른베르크법에 의해서, 유대인은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하여 공직으로부터 추방되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시기에 직장을 잃어, 실업 중이었던 독일인들로 교체되었다. 1938년 11월 9일에 나치는 유대인 상점의 파괴를 실시했다. 사건 당시 수많은 유리창이 깨졌다고 해서 수정의 밤 사건(Kristallnacht)으로 불린다. 이 사건으로 1939년 9월까지 2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미국, 남아메리카등으로 이민갔으며,[1]독일 정부는 그들이 남기고 간 모든 재산을 몰수하였다.
[편집] 제2차 세계 대전
- 이 부분의 본문은 제2차 세계 대전입니다.
나치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빼앗긴 구 독일 제국령에서 프로이센의 반환을 폴란드에게 요구, 거부당하자 1939년에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또, 나치 독일-소비에트 연방 비밀 협정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도 침공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가 강력히 항의하며 선전포고를 함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의 전격전에 의해 폴란드, 프랑스, 덴마크, 노르웨이, 벨기에 및 네덜란드는 정복되었으며, 영국은 본토 상륙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그리스 및 북아프리카로 침공한 후, 나치 독일은 1941년에 소비에트 연방도 공격하였다.
그러나 1943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및 쿠르스크 전투, 1944년의 노르망디 전투 패배 후, 나치 독일 정권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서쪽과 남쪽에서의 연합군 및 동쪽에서의 소비에트 연방군과 폴란드군의 반격에 의해서 점령지는 급속도로 축소되어, 1945년 봄에 연합군은 독일 국내를 침공하였다. 1945년 4월에 히틀러가 자살하였으며, 5월에 나치 독일은 연합국에 대해 무조건 항복하였다.
[편집] 전후
포츠담 회의에 의해서 독일 본토는 분할 통치되어 독일의 국경은 서쪽으로 크게 이동하여 옛 영토의 3분의 1을 잃었다. 대부분은 폴란드령이 되어, 동프로이센의 반은 소비에트 연방에 병합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및 헝가리 지역에서의 소수 민족인 약 1,000만 명의 독일인들은 추방되었다. 미국·영국·프랑스의 서쪽 점령 지역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동쪽 점령 지역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되었다. 서독은 1960년대까지 부흥하였지만, 동독은 1990년대까지 공산주의 지배하에 머물렀기 때문에 복지나 행정이 서독에 비해 크게 뒤떨어졌다.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 들게 한 아돌프 히틀러는 패전 직전에 자살하여, 헤르만 괴링이나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 빌헬름 카이텔 등 남겨진 나머지 나치 독일의 수뇌부의 일부는 연합군에 의한 전쟁 재판인 뉘른베르크 재판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 외에도, 히틀러가 고용한 영화 감독으로 알려진 레니 리펜슈탈이나, 나치 고관이었던 애인의 비호 아래 방탕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코코 샤넬 등 국적을 불문하고, 나치 독일의 범죄 행위에 가담한 예술가나 실업가 등도 전후 죄를 추궁당하여 활동이 금지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모든 비(非)파시스트 유럽 국가에서는 나치당 및 파시스트당의 구성원을 처벌하는 법률이 확립되었다. 종전 전에 도망친 사람들도 국제 수배자 명단에 오르게 되어 최종적으로 체포, 처형되었다.
[편집] 무장 조직
[편집] 정규군
- 국방군 최고 사령부 (Oberkommando der Wehrmacht, OKW)
- 육군 총사령부 (Oberkommando des Heeres, OKH)
- 독일 육군 (Heer)
- 해군 총사령부 (Oberkommando der Marine, OKM)
- 독일 해군 (Kriegsmarine)
- 공군 총사령부 (Oberkommando der Luftwaffe, OKL)
- 독일 공군 (Luftwaffe)
- 육군 총사령부 (Oberkommando des Heeres, OKH)
[편집] 나치당 군사 조직
- 무장친위대 (Waffen-SS)
[편집] 준군사 조직
[편집] 경찰 조직
- 정치 경찰 : 제국보안본부(RSHA, Reichssicherheitshauptamt)
- 치안 경찰 (SIPO, Sicherheitspolizei)
- 게슈타포(Gestapo, Geheime Staatspolizei)
- 형사 경찰(KRIPO, Kriminalpolizei)
- SS보안방첩부(SD, Sicherheitsdienst des Reichsführer der SS)
- 치안 경찰 (SIPO, Sicherheitspolizei)
- 일반 경찰 부문
- 질서 경찰 (Orpo, Ordnungspolizei)
- 도시 경찰 (Schutzpolizei)
- 지방 경찰 (Gendarmerie)
- 시읍면 경찰 (Gemeindepolizei)
- 질서 경찰 (Orpo, Ordnungspolizei)
[편집] 정치 결사
-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NSDAP,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편집] 주석
- ↑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쓴《안네의 일기》를 보면 1938년 유대인 학살이후 독일에서 살 수 없게 되자, 외삼촌들은 미국으로, 자신의 가족들은 네덜란드로 이민가야 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