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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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Paul Gauguin, 1848년 6월 7일 - 1903년 5월 9일)은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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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폴 고갱(Paul Gauguin)은 파리에서 태어나 1865년 견습선원이 되어 상선을 탔으나 1871년 어머니가 죽자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점의 점원이 되어 점원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1873년 덴마크 출생 메트 소피 가드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서 그림에 열중,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곤 하였으며, 27∼28세부터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작품을 출품하여 인상파 화가 C.피사로(1830∼1903)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가 되어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으며, 특히 피사로의 영향을 받았다. 1882년 피사로의 소개로 P.세잔, A.기요맹(1841∼1927)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혀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다.
1886년 6월에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여 폴 세뤼지에, 모리스 드니, 피에르 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즉 인상파에 싫증을 느끼게 되자 명확한 선과 특이한 색조로 장식적인 그림을 그렸다.
1886년 11월 파리로 돌아와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는 깊이 사귀었다. 1887년 처음으로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 섬에 갔다가 이듬해 파리로 왔으며, 이어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그후 다시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을 그리고, 조각·판화·도기에도 손대어 보았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마침내 18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떠났는데, 타히티 섬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그곳 풍물을 많이 그렸다.
《네버모어》,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타히티의 여인들》, 《언제 결혼할까?》 등은 그때의 작품들이다. 그러나 타히티에서도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병마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으며, 원주민을 옹호하여 현지의 백인 관헌과 충돌도 일으켰으나,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키기도 하였다. 1901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 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회복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결국 1903년 환상으로 본 풍경을 그린 《눈 속의 브르타뉴 풍경》을 끝으로 기구한 생애를 마쳤다.
고갱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하였다.
[편집] 화풍
고갱은 검은 윤곽선을 둘러친 평면으로 채색한 클루아조니슴( 종합주의) 기법을 사용하여 인상주의에 속하면서도 상징주의 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인상주의가 주장했던 시각적 효과보다 꿈과 사상, 그리고 상상력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분할되거나 점묘에 의한 필촉 대신 널찍하게 분할된 원색의 색면과 평면적인 구성을 사용했고, 굵직하게 둘러쳐진 윤곽으로 회화의 평면화와 장식성을 추구했다. 기존 화풍과 그만의 독창성은 이 평면성 안에서 상징성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이 상징성은 문명을 벗어난 원시주의로 귀착되었고, 원시성은 타히티섬에서 그가 얻은 영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고갱은 인상주의를 토대로 하였으나, 그만의 화풍을 정립하고자 애썼던 것이다. 고갱은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위해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 많이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린 곳은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이었다. 타히티 섬의 원시림에 묻혀 강렬한 색채와 인간을 통한 근원적인 상징성을 부여하며 새로운 구성을 시도했고, 이것이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편집] 대표작품
- 《황색의 그리스도》
-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 《네버모어》
-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타히티의 여인들》
- 《언제 결혼할까?》
- 《눈 속의 브르타뉴 풍경》
- 《모자를 쓴 자화상》
- 《모성》
- 《과부습작》
- 《야회복을 입은 메트 고갱》
- 《캔버스 앞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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