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안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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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예안 |
시조 | 김상(金尙) |
주요 중시조 | 김로(金輅) |
주요 집성촌 | {{{집성촌}}} |
주요 인물 | 김담 김륵 |
인구([[통계청 {{{년도}}}년 인구총조사|{{{년도}}}년]]) | {{{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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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 김씨(禮安金氏)는 선성(宣城) 김씨라고도 한다. 안동 김씨와 같이 대안군 은열공 김감의 차자 숙의 후손(淑-習敦-相國-正林-僅-富倫-상)이다.
2006년 현재 예안 김씨 문중(종친회)에서 부르는 공식적인 명칭은 '예안(선성) 김씨'이다.
가문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낸 김상(金尙)이다. 고려 말엽의 인물인 8세(八世) 김로(金輅)를 중시조(中始祖)로 하며, 교리공파, 문절공파, 통찬공파, 참판공파, 대사헌공파, 장령공파, 학생공파 등 7개의 큰 분파가 있다.
[편집] 주요 인물
- 김담(金淡, 1416년~1464년) : 10세. 자(字) 거원(巨源), 호(號) 무송헌(撫松軒). 조선 세종, 문종 때의 명신. 이조 판서 역임. 시호는 문절(文節). 단계서원(丹溪書院), 구강서원(龜江書院) 배향.
- 김륵(金玏, 1540년~1616년) : 14세. 자 희옥(希玉), 호 백암(栢巖). 퇴계 이황 문인. 조선 선조 때의 명신. 이조 판서 추증. 시호는 민절(敏節). 구강서원(龜江書院) 배향.
- 김해(金澥, 1534년~1593년) : 14세. 자 사회(士晦), 호 운송(雲松). 임진왜란 때 상주 목사로 참전하여 순절. 이조참판 증직. 공주 우정면 내산리에 충신효자 정려각 위치.
- 김약련(金若鍊, 1730년~1802년) : 21세. 자 유성(幼成). 호 두암(斗庵). 조선 정조 때의 승지. 문집 두암집(斗庵集).
- 김찬규(金燦奎, 1866년~1929년) : 25세. 자 사석(士奭), 호 석연(石然). 독립운동단체 대동단(大同團) 및 의용단(義勇團) 결성.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제255호 추서.
- 김동진(金東鎭, 1867년~1952년) : 26세. 자 국경(國卿), 호 정산(貞山).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활동 등으로 2차례 피검 및 구금.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제1956호 추서.
- 김화진 (金華鎭, 1904년~1946년) : 26세. 자 영중(英仲), 호 대팽(大팽). 무섬 출신으로, 경북 영주청년동맹(榮州靑年同盟)과 신간회(新幹會) 영주지회 집행위원, 영주농민조합(榮州農民組合) 집행위원, 농민조합(農民組合) 및 반제동맹(反帝同盟) 설립을 위한 비밀 협의체 조직 등에 관계하였다.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편집] 집성촌
현재 전국에 약 1만8천 명 정도가 있다. 1930년대 조사에서 가문이 집성촌(集成村)을 이룬 곳의 현재 지명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