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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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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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 {{{총재}}} |
당수 | {{{당수}}} |
의장 | 정세균1 |
대표 | {{{대표}}} |
원내대표 | 장영달1 |
창준위원장 | {{{창준위원장}}} |
창당 | 2003년 11월 11일 |
중앙 당사 |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6가 1331 |
이념/ 정치 노선 |
자유주의 |
국제 | |
웹사이트 | uparty.or.kr1 |
열린우리당(영문:Uri Party)은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킨 새천년민주당에서 정당개혁,정치개혁의 완수를 요구하던 개혁세력이 주축이 되어 2003년 11월 11일에 새롭게 창당되었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열린우리당(약칭 우리당)'이라는 당명은 개방적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당의 4대 강령은 '새롭고 깨끗한 정치실현',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나라구현',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건설', '한반도 평화통일'로서 열린우리당의 정치적·시대적 지향점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2004년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치사상 최초로 의회의 과반을 차지하며 집권여당이 되었으나 김한길 전 원내대표를 비롯한 수 많은 의원들의 탈당으로 과반이 붕괴되고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이 창당되면서 그에 흡수합당되었다.
목차 |
[편집] 역사
[편집] 창당 과정
2003년 11월 11일에 새천년민주당 탈당파 40명, 한나라당 5명, 그리고 개혁국민정당 출신 2명의 의원을 주축으로 하여 당원들의 주체적 참여속에 창당하였다.
[편집] 창당 초기
2004년 1월 11일 임시 전당 대회를 통해 정동영 의원이 첫 당의장에 당선되었으며 김근태 의원이 첫 원내대표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개혁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던데다 부패에서도 자유로웠기 때문에,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밀려 3위를 기록하던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수직 상승하여 1위가 되었다.
한편, 같은 해 3월 9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제출되고 열린우리당은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3월 12일 탄핵소추안은 통과되었다. 이로써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수행이 정지되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연합을 통해 반민주적으로 추진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은 국민의 높은 반대여론에 직면하였으며 우리당은 과반수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편집] 2004년 총선거~2005년
한때 정동영 의장의 노인폄훼 발언과 한나라당의 거여견제론에 의해 제1당 달성이 한때 어렵게 보이기도 하였던 열린우리당은 정동영 의장이 비례대표 의원 후보사퇴 등 최선의 대응을 통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52석을 차지, 의회 과반수 정당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어 헌법재판소는 5월 14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가결안을 기각하였다. 이 판결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권한을 회복하게 됨으로써 국정운영이 정상화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의 수석 당원 자격으로 입당하여 우리당은 명실상부한 집권여당으로 자리잡았다.
총선 이후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의 사퇴로 신기남 의원, 이부영 전 의원이 차례로 의장직을 승계하였으며 천정배 의원이 5월에 새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2004년 열린우리당은 4대개혁입법으로서 '국가보안법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사립학교법','언론개혁법'을 제시하고 힘있게 추진하였으나 국민의 개혁요구에도 불구하고 121석의 한나라당은 4대개혁입법에 완강하게 저항, 정상적인 국회운영마저 저지하고 나섰다. 결국 2004년 말, 천정배 원내대표는 4대개혁입법을 완수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되었다.
2005년 1월초, 당의장을 맡게 된 임채정 의원은 한국사회의 양극화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선진사회협약 체결>을 제시하였으며 1월에 정세균 의원이 원내대표로 당선되었다.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한 거대여당의 탄생은 재보궐선거에서 유권자의 자연스러운 견제심리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서민경제활성화·개혁완수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 신속하게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당의 반성에도 불구하고 이후 열린우리당은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2005년 4월 2일의 정기전당대회를 통해 당선된 문희상 의원은 양극화해소와 동반성장, 그리고 당의 리더쉽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장 취임직후 실시되었던 4월 재보궐선거와 10월에 실시된 두차례의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상임중앙위원들과 함께 사퇴하였다. 이후 우리당은 비상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정세균 의원을 당의장에 겸임 선출하였다. 정세균 의장은 어수선했던 당내 분위기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국민적 요구가 높았던 사립학교법개정안을 야당의 물리적 반대를 뚫고 국회 통과시킴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었다.
[편집] 2006년
2006년 1월 2일 정세균 의원이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내정되어 당의장을 사퇴함으로써 1월 8일 유재건 의원이 임시 당의장을 승계했고, 1월 23일 김한길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우리당은 2006년 5월 3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2월 18일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당 지도부를 구성하고 국민적 지지회복에 전력을 다하였다. 당원들은 어려운 당상황을 극복하고 5.31 지방선거를 이끌어나갈 당의장에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을, 최고위원으로 김근태,김두관,김혁규,조배숙 의원을 선출하였다.
2006년 1월 당시, 한나라당은 국민의 높은 지지속에 통과된 '사학법개정'을 반대하며 국회의 정상적 운영을 가로막고 국회앞에서 시위를 일삼고 있었다. 우리당은 국회정상화 노력을 통하여 2006년 2월 임시국회가 개최되도록 하였으며 국민의 생활을 가장 가까이에서 책임지는 지방정부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개선을 추진하였다.
2006년 '5.31 지방선거는 부패한 지방정부를 심판하라는 중차대한 과제를 부여받고 있었다. 우리당과 국민들은 한나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지방정부의 부패청산을 요구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열린우리당은 2006년 5월 31일에 열린 지방선거에서 전북 한곳만 얻고, 참패를 당했다. 이에 정동영 의장이 물러나고 김근태 의원이 당의장직을 승계하였다. 김근태 의장은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서민경제회복과 기업의 투자활성화, 일자리창출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과 10월의 재보궐 선거에서도 우리당은 연패했으며, 정당의 지지도는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채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편집]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우리당은 지지자와 국민으로부터 새로운 변화를 강하게 요구받기 시작하였다. 우리당은 새로운 정치,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정치를 위한 최우선과제가 평화민주개혁세력의 대단결, 대통합신당의 건설이라는데 뜻을 같이 하고 2006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민주당과의 재통합, 시민사회 등 다양한 연대 등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평화민주개혁세력의 대통합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대통합신당 건설을 앞당기고자 하는 고민속에 당의 일부는 탈당을 선언하였다. 2007년 1월 22일 임종인 의원을 시작으로 1월 23일 최재천, 이계안, 1월 28일 천정배, 1월 30일 염동연, 2월 3일 정성호 의원이 연이어 탈당하였다. 2월 6일에는 소속 국회의원 23명 집단 탈당함으로써 열린우리당은 의회 제2당으로 변모하였으며 2007년 6월 에는 추가적으로 16명이 탈당하면서 2004년 4월 15일 총선때 152석 이었던 의석수는 73석으로 줄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대통합과 2007년 대선승리를 위한 전 당원의 결의를 다지고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하여 2월 14일 전당대회를 개최하였다.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은 정세균 당의장을 선출하였다. 아직 낮은 국민지지도와 일부 의원들의 집단탈당등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속에서 전당대회가 자칫 무산될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우리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모인 약 72%의 당원들이 참석하여 <대통합을 통한 2007년 대선승리>를 결의하였다. 이와 함께 원내대표 장영달 의원을 비롯한 최고위원들을 전당대회에서 선출하였으며, 이들에게 대통합신당의 추진권을 위임하였다.
그러나 2007년 8월 20일 열린우리당은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와 김한길을 비롯한 구 중도통합민주당 탈당파, 열린우리당 탈당파, 그리고 시민단체가 주축이된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합당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편집] 조직
[편집] 역대 당의장
- 김원기 : 2003년 10월 27일 창당준비위원회 임시 의장
- 정동영 : 2004년 1월 11일
- 신기남 : 2004년 5월 17일
- 이부영 : 2004년 8월 20일
- 임채정 : 2005년 1월 5일
- 문희상 : 2005년 4월 2일 제2차 전국대의원대회 개최, 당의장 선출
- 정세균 : 2005년 11월 비상집행위원회 체제, 임시 당의장
- 유재건 : 2006년 1월 6일 - 2월 18일에 개최될 예정인 전당대회까지의 임시 당의장으로 선출
- 정동영 : 2006년 2월 18일 - 임시 전당대회에서 최대 득표인 4850표(48.2%)를 득표하여 당의장으로 선출 (6월 1일 사임)
- 김근태 : 2006년 6월 9일 - 5월 31일 지방선거 참패에 책임을 지고 기존 지도부가 사퇴함에 따라 새 당의장에 선출
- 정세균 : 2007년 2월 14일
[편집] 역대 원내대표
- 김근태 : 2003년 10월 27일 창당 준비위원회에서 원내대표로 선출
- 천정배 : 2004년 5월 11일
- 정세균 : 2005년 1월 24일
- 김한길 : 2006년 1월 23일
- 장영달 : 2007년 1월 31일
[편집] 주요 활동
[편집] 강령과 주요 정책
[편집] 강령
- 새로운 정치
- 잘사는 나라
- 따뜻한 사회
- 한반도 평화
[편집] 주요 정책
- 참여와 포용의 선진 민주주의, 유능한 민주정부의 실현
- 자유와 공정, 사회통합의 시장경제 발전
- 경제혁신과 세계 일류산업국가의 건설
- 양극화 해소와 선진복지사회의 구현
- 한반도 평화체제와 경제공동체 구축
- 동북아 평화번영과 협력적 자주국방의 달성
- 교육입국과 지식문화강국의 건설
- 저출산 극복과 고령화사회 대비
- 남녀가 평등하여 행복한 가족사회
- 국토의 균형발전과 건강하고 품위있는 도시건설, 농어민 삶의 질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