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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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년 1월 3일 ~ 1867년 12월 10일)는 일본의 유신지사다. 도막운동(바쿠후 타도운동)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메이지유신 직전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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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성장
사카모토는 음력 1835년 11월 15일, 시코쿠의 도사 번(오늘날의 고치 현) 고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치헤이는 하급무사인 고시계급이었다.
1853년 에도로 유학하여 북진일도류 치바도장에서 검술을 배우면서, 한편 에도의 존왕양이론자들과 사귄다. 그해 페리 제독이 내항했으며, 무사계급에서는 서양에 개항하려는 막부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편집] 탈번
사카모토는 1861년 도사근왕당(도사출신의 하급무사들이 천황을 지키고 토쿠가와 바쿠후를 타도하기위해 모인 모임)에 참여한다. 1862년 근왕당은 번의 중신 요시다를 암살하며, 사카모토는 탈번하여 낭인(소속이 없는 사무라이)으로서 에도로 올라온다. 탈번은 사형에 처하는 중죄이다.
그해 개화파인 막부 관리 가쓰 가이슈를 죽이려다 오히려 설복돼 그의 제자가 된다(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가쓰에게 서양 문물을 배운 사카모토는 양이에서 개화로 생각이 크게 바뀌며, 번이라는 작은 나라(国)가 아니라 일본국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이듬해 가쓰를 도와 고베 해군훈련소 설립에 힘쓴다. 이후 가쓰가 물러나고 훈련소가 문을 닫자, 사카모토는 무역회사 가이엔타이(海援隊)를 세운다. 가이엔타이는 이후 도막파에 군수 보급을 하기도 한다.
도막의 중심은 사쓰마번(가고시마 현)과 조슈번(야마구치 현)이었다. 사카모토는 동향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사이가 나쁜 두 번을 중재하여, 1866년 삿초동맹(사쓰마와 조슈)을 결성하는 데 공헌한다.
[편집] 죽음
1867년 교토로 가는 배에서 사카모토는, 대정봉환 등의 구상을 담은 선중팔책을 입안한다. 그리고 대정봉환이 이루어지면서 정권은 막부에서 조정으로 평화적으로 넘어온다.
대정봉환 한달 뒤 사카모토는 나카오카와 함께 교토에 머물다, 음력 11월 15일 여관 오미야에서 습격을 받고 피살된다. 누구 소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막부측 미마와리구미가 유력한 가운데, 신센구미, 아군인 사쓰마 등 여러 설이 있다. 사카모토는 머리에 상처를 입었고 천천히 죽어갔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당시 같이 습격당했던 나카오카가 중태인 가운데서도 3일간 생존했기 때문에 그에 의해 소상히 전해 질 수 있었다. 유족으로 부인 오료와 누나 오토메 등.
이 암살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하자면, 범인은 거의 미마와리구미(견회조, 막부순찰대)가 확실시되고 있다. 실제로 그 이외에 다른 유력한 범인이나 증거도 없을 뿐더러 대개 미마와리구미와 관련되거나 유사한 설이기도하다.
신센구미가 당시 유력한 암살 용의자로 지목되었으나, 그것은 모두 이하의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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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7일전(3일전이라고도 한다), 전 신센구미의 참모이자 능위사인 이토 카시타로가 찾아온다.
이 자가 말하길, "나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 지금 신센구미가 당신을 노리고 있으니 모쪼록 조심하라." 라고 했는데, 당시 료마는 신센구미를 배신해 사츠마 번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이토를 그닥 좋게보지 않아서 그의 충고도 흘려들었다.
게다가 실제로 사건이 발생한 날, 현장에서 칼집과 나막신이 발견되었는데, 이때 기다렸다는듯이 달려온 이토가 "이 칼집은 10번대 하라다 대장의 것인 듯 하다." 라고 증언했고, 그 나막신역시 신센구미가 자주 드나드는 후쿠베 정의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 증언을 한 3일 뒤, 11월 18일에 이토 일행은 아부라코지에서 신선조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일련의 사건이 신선조의 료마 암살설을 더욱 굳혔던 것이다.
그러나 암살을 하러가는 자객이 쿵쿵 소리나고 움직이기도 어려운 나막신을 신는다는 것도 언어도단이며 료마를 암살했다는 것은 당시 엄청난 자랑으로서, 떠들고 다녔으면 몰라도 숨길 일은 아니었으므로, 신선조 측이 당시 극구 부정한 것도 이상하다.
실제로, 이후 무진전쟁이 끝나고 체포되었던 전 미마와리구미의 대원 이마이 노부오가 료마암살이 자신들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하며 당시의 세세한 정보를 모두 말한 것이 교부쇼(강무소) 공술서에 기록이 되어있고, 아직까지도 이를 상회할 만한 사료는 나오지 않고있다.
[편집] 료마 암살의 전말
진범은 미마와리구미 대장 사사키 타다사부로 이하 이마이 노부오, 카츠라 준노스케, 타카하시, 와타나베 키치타로 등 7인으로, 이들이 1867년 11월 15일 교토 오오미야를 습격해 료마를 암살한다.
이날 오전부터 이마이 노부오와 카츠라 준노스케가 오오미야를 찾아가 료마를 습격하려했으나, 당시 료마는 다른 일로 부재 중이었고, 이들은 오오미야 옆 히가시야마라는 사원에서 시간을 끌다가, 동전을 넣고 기도했다고 한다.
"제발 죽일 수 있게(성공할 수 있게) 해주소서." <- 당시 이마이 노부오가 증언한 기도 내용
그리고는 돌아와 오오미야의 건너편 여관에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8시 반 경에 나왔다고 한다.
당시 료마는 2층에서 나카오카 신타로, 오카모토 겐자부로(토사 번) 등과 함께 잡담을 즐기고 있었으나 8시 반 경 겐자부로가 사무가 있다고 하고 나온다. 동시에 료마와 친했던 심부름꾼 키쿠야란 소년이 료마가 닭 요리를 가져오라고 해서 오카모토와 함께 나갔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대장 사사키 타다사부로가 혼자 들어와 1층에서 발톱을 깎고있던 료마의 시종을 보고,
'토츠가와 향사입니다. 사이타니(사이타니 우메타로, 료마의 가명) 선생님은 계십니까.'
라고 물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시종은 토츠가와 향사가 료마를 많이 도와줬기에 아무 의심없이 명패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간다.
이순간 사사키의 신호를 받은 2인이 달려올라와 시종을 3번 베어 쓰러뜨린다.
그리고 남은 4인이 각각 여관의 앞,뒷문을 사수,차단하고 주인 내외를 조용하라고 협박하는 등 여관을 완전 봉쇄했다.
큰 덩치의 시종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자 2층 방 안의 료마는 이 시종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
늦은 밤에 다른 손님들께 폐가 된다 싶어 '참아라!!(조용해라!!)' 라고 말하는데, 이 소리를 암살자 2인이 들어 료마의 방으로 즉시 침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뜻밖의 인물(나카오카 신타로)이 있는 것에 놀라, 문 앞에서 정좌, 암살범 중 하나인 카츠라 준노스케가 말했다.
"사카모토 선생님, 격조하였습니다."
"어떤 분이신가요?"
대답하는 쪽이 사카모토 료마라고 판단한 카츠라가 엄청난 속도로 발도하여 료마의 앞 머리를 아래에서 위로 벤다.
이 타격은 그다지 치명상은 아니어서, 료마는 바로 등을 돌려 등 뒤의 칼을 잡았다. 이순간 나카오카가 병풍 뒤의 칼을 잡으려 하나 자객이
"크나쿠소!!(냄새진한 똥같은 놈)" 이라는 이요방언을 외치며 나카오카의 후두부를 벤다.
나카오카가 별수없이 소도로 잘 싸웠으나 왼손, 오른손, 양 다리를 베이고 결국 쓰러진다.
동시에, 칼을 잡은 순간 료마는 등을 베였고, 몸을 돌리는 순간 자객의 3번째 칼이 료마의 칼집에 부딪혔다.
그 위력이 얼마나 센지 자객의 칼은 료마의 칼집을 베고도 그 속의 칼을 베었다. 그 날카로움과 힘에 부쳐 결국 료마는 이 세번째 칼에
이마를 깊게 베이게 되고, 자객들은
"이제 되었다. 이제 되었다." 라고 말하며 유유히 사라진다. 떠나기 전, 나카오카의 쓰러짐이 어색했던지 자객은 엉덩이부터 허리까지 깊게 벤 다음 돌아갔다. 이 충격에 나카오카는 깼다.
료마는 얼마 후에 일어났는데 그 몸으로도 문까지 걸어가
"신죠(오오미야 신죠, 여관 주인)... 의사를 불러."
라고 말한 다음에 비척비척 걸어와서는 칼을 뽑아 등불에 비춰 자신의 상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한다.
"신타로, 오른손목은 괜찮나."
이에 신타로는
"잘 듣는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료마는 다시
"신타..신타...나는 틀렸다. 나는 이마를 깊이 베였다. 나는 안된다... 이제 안된다..."
라는 말을 끝으로 더이상 이어지지 않더니 그 상태로 죽었다고 한다.
신타로는 상처를 부여잡고 일어나 창문을 넘어 지붕가로 걸어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자신도 힘에 부쳐 쓰러지고 말았다. 사건 발생 후, 9시~9시 반 경에 닭 요리를 사러 나갔던 키쿠야가 돌아와 이 참상을 목격하고 바로 달려나가 육원대(리쿠엔타이->신타로가 이끈 무력 막부타도파) 숙소로 달려가 알리게 되고, 다니 간스케가 달려와 료마와 신타로, 쓰러져 있던 료마의 시종을 육원대 본영으로 데려온 뒤, 깨어난 나카오카의 증언을 들었던 것이다. 나카오카는 이후 사흘 뒤에 죽었다.
이상이 이마이 노부오 진술과 나카오카 신타로의 증언으로 합쳐진 료마 암살의 전말이다.
나오는 말들이나 행동은 모두 픽션이 아니라 증언을 그대로 옮긴 사실임을 밝혀둔다.
[편집] 평가
훌륭한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한번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알려져서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다. (그를 암살하기 위해 막부순찰대 30인 정도가 습격했던 테라다야 사건 때,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권총으로 바쿠리(幕吏) 두 명을 살해한 적은 있는데, 이것이 유일하게 밝혀진 료마의 살인 기록이다.(후에 미마와리구미측이 주장하길, 이때의 살인이 료마 암살 명분이 되었다고 한다.)그러나 실제로, 그는 칼로 사람을 베어 죽음에 이르게 한적은 없다. 칼에 대해서는 불살의 신념을 지켰다. 바로 이 점이 많은 일본인들이 료마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돈만을 쫒아다닌다는 주변의 평도 있었다. 오늘날 료마(竜馬)는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역사상 인물 중 한사람이다.
[편집] 관련 서적
- 료마가 간다
사카모토는 종래 크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다 1962년부터 연재된 시바 료타로의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명해졌다. 여기서 그는 난세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고 실행하는 풍운아로 그려진다.
- 오이 료마 (おい 竜馬)장편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