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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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금(朴春琴, 1891년 4월 17일 ~ 1973년 3월 31일)은 일제 강점기의 직업적 친일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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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천자문을 읽었을 뿐 무학이다. 한말 무일푼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고용살이, 자전거 직공, 탄광갱부, 노무자 등 육체노동으로 전전하면서 거물 폭력배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기반에서 흑룡회 계열의 폭력배 거두 도야마 미쓰루(일본어: 頭山滿)라는 지우를 얻고, 1920년 도쿄에서 이기동 등과 더불어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동경에서 상애(相愛)·공존공영 정신에 입각한 일선융화를 표방하면서 노동단체 '상구회'(相救會)를 조직했고 회장에 취임한 뒤, 이를 1921년 사회사업단체(실제로는 폭력조직이었다.) "상애회"(相愛會)로 개편하였다.[1] 이 단체는 재일조선인 노무자의 사상 통제를 목적으로 일본 경보(警保) 당국과 총독부 등이 사주, 후원하여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애회는 조선인 노무자의 교화·구제를 위하여 직업소개, 인사 상담, 공동숙박소 건설 등을 사업으로 표방했으나, 일본인 기업주 편에서 노무자를 학대, 압박한 폭력 착취단체였다.
1923년 9월 1일의 간토 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학살사건이 가라앉을 무렵 그는 조선인 노무자 300명으로 된 노동봉사대를 결성하고, 경시총감 아카치(赤池濃)와의 연락하에 시체처리와 조선인 노무자의 색출 및 수용 등의 작업에 종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일본적 조직확대의 기반을 잡아 1928년에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확충하고, 전직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재단이사장으로 영입하였다.
한편, 그는 조직을 조선에까지 확대하여, 1924년 4월 지부격인 노동상애회를 서울에 조직하였다. 《동아일보》가 친일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하자 송진우를 납치, 폭행하였으며, 1924년 7월의 하의도(荷衣島) 소작쟁의에서도 상애회원으로 하여금 농민층 청년회를 습격하게 하였다. 이러한 폭력적 기반 위에서 1932년 도쿄 제4구에 입후보하여 일본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고, 1940년에서 1942년에도 일본 제국의회의 중의원을 역임하였다.
조선으로 드나들면서 춘만광산(春滿鑛山) 등 이권사업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며, 중일전쟁 이후 ‘동양평화를 위하여’ 등의 연제로 황민화 시국강연을 하였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필승체제 확립과 내선일체의 촉진을 목표로 야마토동맹(大和同盟)을 조직, 이사에 취임하였으며, 시간극복대강연회(時艱克服大講演會) 등을 주최하여 필승사상을 고취하였다.
그가 당수로 있던 대의당(大義黨)은 광복 50일 전인 1945년 6월 24일에 결성된 것인데, 항일·반전(反戰) 사상의 격파를 목적한 폭력단체로 전해지고 있다. 이 단체가 주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1945년 7월 24일, 부민관)에는 강윤국(康潤國)·유만수(柳萬秀)·조문기 등 세 청년이 장치한 폭탄이 작렬함으로써 항일의거의 마지막 장을 빛나게 하였다.
광복 후에는 일본으로 밀항하여 그 곳에서 사망했다.
[편집]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편집] 참고자료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7년 12월). 〈박춘금〉, 《2007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2347~2376쪽. 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3월 1일). 〈박춘금 : 깡패에서 일본 국회의원까지 된 극렬 친일파 (김대상)〉, 《친일파 99인 2》.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24.
- 방학진 기자. "‘정치깡패 원조’ 박춘금 - 일본 제국 중의원(국회의원) 두번 지낸 반민족행위자", 《참말로》, 2005년 3월 26일. 2008년 2월 20일에 읽어봄.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민족정기의 심판》(革新出版社, 1949)
[편집] 주석
- ↑ 반민족문제연구소,《친일파99인》2권 (돌베게, 1993년) 61쪽 (김대상 집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