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가타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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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 1846년 - 1893년)는 에도 시대 말의 다이묘이자 무쓰노쿠니 아이즈 번의 마지막 번주이며 쿄토 수호직을 역임했다.
미노노쿠니 다카스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타쓰의 6남으로 형인 도쿠가와 요시카쓰, 도쿠가와 모치노리, 남동생 마쓰다이라 사다아키를 합쳐 다카스 4형제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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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약력
[편집] 아이즈 번주 취임
고카 3년(1846년) 8대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타카의 양자가 되고 가에이 5년(1852년)에 번주를 승계했다. 만엔 원년(1860년)에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가 미토 번 출신의 낭인에게 암살당한 사쿠라다문외의 변으로 미토 번을 토벌하려는 것을 반대했다. 분큐 2년(1862년)에 신설된 쿄토 수호직에 임명된다. 당시에도 감기로 자주 앓아 누울 만큼의 병약 체질이었던 가타모리는 사이고 다노모를 비롯한 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의 강권에 의해 중임을 떠맡게 된다.
[편집] 교토 수호직
교토 수호직으로 취임한 다카모리는 즉시 아이즈 번의 군사를 인솔하고 상경, 고메이 천황을 배알하고 존황양이파와 대화를 통한 조정을 시도하는 방침으로 교토를 다스렸다. 이러한 다카모리의 행동에 대해 도쿠가와 요시노부 등은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시카가 3대(무로마치 막부 쇼군 3명) 목상 효수사건을 계기로 정책을 180번 전환하고, 낭인을 모집한 무사조(훗날의 신센구미)를 조직하여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경호와 교토 시내의 치안 유지를 맡겼다. 공무합체파 및 존황양이파를 적대하여 겐지 원년(1864년)에 일어난 궁궐 습격사건 등을 일으킨 조슈 번에 대항하게 된다.
게이오 2년(1866년)에 고메이 천황이 사망한 후, 수호직 사퇴를 몇번이나 신청했으나 막부, 교토 조정 양측 모두 인정하지 않았고 조정의 명령애 따라 교토에 남아있게 된다.
게이오 3년(1867년)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으로 에도 막부가 소멸하고 교토 수호직도 폐지된다. 왕정복고 이후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중심이 된 메이지 신정부군과 싸운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막부의 옛 신하들 사이에서 항전파와 항복파가 대립하였지만 아이즈 번 가신 대부분은 무장 항전을 지지하였다.
[편집] 아이즈 전쟁
아이즈 번으로 돌아온 가타모리는 양자 마쓰다이라 노부노리를 후계자로 삼고 근신하였다. 당시 메이지 정부군은 가타모리를 막부파의 중진으로 여겨 아이즈 번을 침략,아이즈 번의 항복을 받아내게 된다.
[편집] 메이지 시대
만년의 가타모리는 톳토리 번의 감시 하에 도쿄에서 칩거하게 되지만, 맏아들 가타하루의 가문 승계를 인정받아 화족이 될 수 잇었다. 다카모리는 곧 칩거에서 풀려나 메이지 13년(1880년)에는 닛코 토쇼궁의 미야지가 되었다. 쇼우조우위까지 서임해, 메이지 26년(1893년) 12월 5일 도쿄 메구로의 자택에서 폐렴으로 사명한다. 향년59세. 죽기 전날 메이지 천황에게서 우유를 하사받았다. 덧붙이자면 다카모리는 고메이 천황에게서 받은 서간 등을 소중하게 여겨 죽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에도 막부 말기의 유신에 대한 어떠한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메이 천황의 자필 문서에는 다카모리의 교토 수호직 임무를 격려하는 부분이 있어 천황이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알 수 잇다. 이것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역적으로 정의한 호우쵸 주체의 역사관에서는 매우 불리한 것으로 호우쵸 측에 있어서는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에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천황의 자필 문서 내용을 알고 경악하여 2만엔(현재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수억엔 이상의 가치가 된다)에 이를 입수하려고 했지만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이 거절하였다.
묘소는 후쿠시마 현아이즈 와카마츠 시 마쓰다이라 가문 신사 및 도쿄 도 신쥬쿠 구 정수원.
[편집] 쇼와 시대
쇼와 3년(1928년,무진년/ 메이지 유신 60주년),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다이쇼 천황의 둘째 아들)과 마쓰다이라 세츠코(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6남 쓰네오의 장녀)의 혼례가 거행되엇다.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과 황실의 결혼은 역적의 오명을 썼던 아이즈 번의 명예가 회복된 것을 의미한다. 같은 해 자모택관의「신센구미 시말기」,히라오 미치오의「신센구미사녹」이 간행되어 역적으로 여겨졌던 신센구미가 재평가되는 전환이 된 해였다.
[편집] 가족 관계
- 아버지:마쓰다이라 요시타쓰
- 양부:마쓰다이라 가타타카
- 어머니:측실 코우모리씨
[편집] 형제
- 마쓰다이라 사다아키(쿠와나 번주)
- 마츠다이라 모치노리(타카스 번 13대주)
- 도쿠가와 요시카쓰(오와리 토쿠가와가 14대,17대 당주)
- 마쓰다이라 다케나리(하마다 번 3대 번주)
- 도쿠가와 모치노리(다카스 번 11대 번주, 오와리 토쿠가와가 15대 ,히토쓰바시 토쿠가와가 10대 당주)
[편집] 형수 및 의자매
- 테루 히메
- 사토시 히메
[편집] 부인(정실)
- 사토 히메 (마쓰다이라 가타타카의 5녀) - 14세에 가타모리와 혼인했지만, 19세에 사망했다
- 浦乃局
[편집] 자녀
- 마쓰다이라 가타하루(장남)
- 마쓰다이라 다케오(차남) (이사스미 신사)
- 마쓰다이라 히데오(5남) (야마다 백작가의 데릴사위)
- 마쓰다이라 쓰네오(6남) (주영 대사 역임)(도쿠가와 종가 18대 쓰네나리의 조부)
- 마츠다이라 야스오(7남) (해군 소장 역임)
[편집] 양자
- 마쓰다이라 노부노리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19남)
전 임 마쓰다이라 가타타카 |
제9대 아이즈 번 번주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 1852년 ~ 1868년 |
후 임 마쓰다이라 노부노리 |
전 임 마쓰다이라 가타타카 |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 당주 1852년 ~ 1869년 |
후 임 마쓰다이라 가타하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