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원봉(金元鳳, 1898년 음력 8월 13일∼ 1958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약산(若山).
[편집] 생애
경상남도 밀양 태생이다. 중앙중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 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1919년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를 위한 무장항일운동 조직 의열단을 조직하여 여러 차례 폭력항쟁 활동을 벌였다.
이후 조직적인 무장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이 합작하여 만든 광저우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고, 이곳에서 얻은 지식 및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1930년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1938년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에 항일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편성하여 대장에 취임했다.
초기에는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때문에 우파인 김구와 대립했으나, 〈동지 동포에게 고함〉(1939년)이라는 성명서를 김구와 공동 명의로 발표하는 등 좌파와 우파의 합작 노선을 걷게 되었다. 이후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하다가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했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김원봉은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1] 1946년 2월 15일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의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 [2]
그러나 1948년 남북대표자연석회의 때 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조선을 방문한 뒤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월북 인사가 되었고, 그해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내각 국가검열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남한에서 미군정 치하의 경찰에 붙들렸을 때 친일 경찰로 유명한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은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들이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의 보호를 받으면서 득세하는 잘못된 사회 흐름에 실망한 것이 월북의 한 동기라는 일화가 있다.
한국 전쟁 이후로도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고위직을 거쳤으나, 1958년 연안파가 숙청될 때 실각했다. 이후 자살설 등이 떠돌아 실각직후 곧바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사망 시기나 경위는 알 수 없다.
첫 부인은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지낸 박차정이며, 두번째 부인 역시 조선의용대 출신의 최동선이다.
[편집] 참고자료
- 강준만 (2004년 4월 3일).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8∙15해방부터 6∙25전야까지)》. 서울: 인물과사상사. ISBN 8988410890.
- 이원규 (2005년 8월 10일). 《약산 김원봉》. 서울: 실천문학사. ISBN 9788939205192.
- 한국방송, 〈3.1절 기획/ 조국의 이름으로 응징하라 - 의열단 김원봉〉, 《인물현대사》 (2005년 2월 25일 방영)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이 달의 독립운동가 상세자료 - 박차정, 2006년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이 달의 독립 운동가 상세자료 - 윤세주, 1993년
- 심규상. "일제가 가장 무서워한 김원봉, 우린 왜 모르지? - 김원봉 선생 사망 50주년... 친일파에게 수모당해 월북 후 의문사", 《오마이뉴스》, 2008년 2월 25일. 2008년 3월 1일에 읽어봄.
[편집] 주석
- ↑ 1945년 9월~: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60쪽
- ↑ 강준만 (2004년 4월 3일). 〈제2장 좌우(左右) 갈등의 폭발/ 1946년 – 민주의원과 민족전선 출범〉,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8∙15해방부터 6∙25전야까지)》. 서울: 인물과사상사, 211. ISBN 8988410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