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하드리아노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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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노 4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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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하드리아노 4세(라틴어: Hadrianus IV, 이탈리아어: Papa Adriano IV)는 제169대 로마 교황(재위: 1154년 12월 4일 - 1159년 9월 1일)이다. 세속명은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영어: Nicholas Breakspear)이다.
[편집] 생애
잉글랜드 출신으로 집안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별로 없으나 평민 출신인 듯하다. 어릴 때 잉글랜드를 떠나 에스파냐 발렌시아 근처 성 루푸스 성당의 의전 사제단에 가입하여 능력과 재능을 인정받아 교회의 일을 보게 되었다. 아빠스가 된 후 공동체와 문제가 생겨 교황청에 상소하여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지지를 받았다. 단호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로 인정되어 에우제니오 3세는 그를 1149년에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교황청 사절로 스칸디나비아에 파견되어 북부 지역의 교회들(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을 정상화시키고 교황청과 좋은 관계를 맺게 하였다. 그의 사절 임무는 성공적이어서 중요한 교구들이 증설되었고 교회가 점차 질서 있게 운영되어갔다.
교황 아나스타시오 4세가 선종하자 그는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어 영국인으로 교황이 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의 재위 5년은 불안정한 시기였으나 교황직의 역사에는 중요한 시기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이탈리아 재침략 시도, 신성로마제국의 위협, 로마에서는 브레시아의 아르놀드의 선동적이고 반항적인 연설, 탐구에서 기인된 새로운 변증법적 방법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와 아벨라르의 갈등에서 나온 전투적인 영적 불안정 상태와 십자군 원정에 대한 불안정한 결과들, 교황령에 대한 시칠리아 왕국의 잦은 공격 등올 불안한 시대였다.
하드리아노 4세는 교황직의 전통적인 원칙, 즉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방법에 집착하였다. 교황으로서 제일 먼저 보여준 단호함과 용기는 역사 이래 처음으로 로마에 성무 집행을 금지시킨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을 실행한 후에야 그 조치를 철회하였다.
신성로마제국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롯사는 지속적으로 교회를 국가의 통치 아래 두려 하였고 하드리아노 4세는 도시들을 병합한 후 롬바르드 연합을 결성하여 프리드리히 1세와 대치하였다. 하드리아노는 이른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라는 문서를 근거로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시칠리아 왕국과는 좋은 관계를 맺어 교황의 신하로 맞아들였다. 잉글랜드 왕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비록 여러 가지로 논란이 있었으나 아일랜드를 잉글랜드 왕국에 귀속시킨다는 칙서 《라우다빌리테르》는 잉글랜드의 헨리 2세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다.
그가 시도한 정책은 결국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교황권의 절정을 보게 된다.
전 임 아나스타시오 4세 |
제169대 교황 1154년 12월 4일 - 1159년 9월 1일 |
후 임 알렉산데르 3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