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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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許浚, 1539년~1615년)은 조선 중기의 의관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이다.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 허곤(許琨)의 손자이자 용천부사(龍川府使) 허윤(許崙)의 차남이다. 일본에서는 그를 가리켜 “한국행림(韓國杏林) 편창(扁倉)”이라 하였고, 중국에서는 “천하(天下)의 보(寶)를 만든 사람”이라며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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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기 그지없었지만 서자(庶子) 출신이었기 때문에 문과에 지원하지 못하고 1574년 의과에 지원해 급제하여 내의원(內醫院)에서 갖가지 병을 고쳐 궁중 의사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선조의 중병을 고쳐 신망을 얻게 되어 어의(御醫)로 선임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그의 건강을 돌보았는데, 그 공로로 훗날 공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1608년 선조가 병세가 급박하다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종래의 예에 따라 조정 신하들의 갖가지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결국 사직당하고 만다. 그러나 허준은 이런 와중에 1610년 그 당시의 모든 의학지식들을 다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을 편술하였다. 이 동의보감 덕으로 저 멀리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에까지 전해져 조선의 뛰어난 의학 수준을 과시하였다.
1610년 선조 때부터 저술에 착수했던 의서 《동의보감》을 완성시켜 광해군에게 바친 이후 귀양이 풀리고 신원되어 내의원에 복직한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 8월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그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시 장단군의 민간인통제구역(DMZ) 안에 위치해 있다.
묘소는 6.25 전쟁 이후 방치되어 있다가 1991년 군사 협조 아래 역사학자 이양재 교수와 종친회, 그리고 허준선생기념사업회의 조사활동으로 다시 발견되어 현재는 완전히 재정비되어있다. 2006년 5월 군사안보 관광 구역으로 공개되었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공원인 구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편집] 사후 관작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 간 선조를 끝까지 보필하고 간호한 공로로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이 되어 양평부원군(陽平府院君)과 당상(堂上)의 부군(府君),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추증되었다.
[편집] 출생 시기에 대한 논란
1990년을 전후까지는 양천허씨종친회의 족보에 기재된 1546년 출생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지만, 1999년에 조선 중기의 의례 서적 중 하나인 《태평회맹도》에 그의 출생 연도가 기해년(己亥年), 즉 1539년(중종 34년)생이라는 기록이 발견되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문장가 최립(崔笠)의 문집(文集) 《간이집(簡易集)》에서, 최립이 자신의 친구 허준이 의주로 귀양가게 되던 1608년경의 일을 기록하면서, 허준이 자신과 동갑내기인 1539년생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재는 허준의 출생 연도를 1539년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