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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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소독일주의로 통일을 추구하던 프로이센과 대독일주의를 지향하던 오스트리아 합스부크르왕조 간에 독일연방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함으로써 독일은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로 통일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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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전쟁 준비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기 전에는 통일 논의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보수파였던 비스마르크의 시각에서 자유주의적 의회 운동으로 독일 통일을 이룰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그가 괜히 철혈재상으로 불린 것이 아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가 단일 독일 국가 건설에 참여할 이유가 없었고, 현재 상태로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은 비스마르크는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를 무력으로 배제해야 했으나, 그 전에 다른 나라들의 방해를 받지 않을 준비가 필요했다. 오스트리아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전략이었다.
[편집] 폴란드 반란과 러시아
첫번째 계기는 폴란드 반란이었다. 폴란드는 1863년에 의회를 인정받는 등 상당한 자치권을 보장받았지만, 급진파는 완전 독립을 요구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비스마르크는 이 사태에 직면하여 짜아르의 호의를 얻고자 적극적으로 도움을 제안하고 국경선을 봉쇄한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같이 개입하려 했고 폴란드인들도 프랑스가 개입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실제로 나폴레옹 3세는 러시아에 충고와 경고를 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영국은 폴란드 독립보다는 프랑스의 움직임에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끼어들 처지가 아니었다. 영국은 불개입을 천명했고, 프랑스는 머뭇거렸으며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동안 친프랑스적이던 러시아가 친프로이센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편집] 덴마크와 국경분쟁
두번째 계기는 덴마크와 국경 분쟁이었다. 소유관계가 복잡한 쉴레스비히와 홀쉬타인 지역을 덴마크 왕이 독일연방과 아무런 상의없이 병합을 선언하자 독일연방 의회는 즉각 철회를 요구했고 덴마크가 1852년 런던 협정을 깨자 그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던 비스마르크는 개입의 명분을 얻어, 독일연방의 이름으로 개입을 희망했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의장국의 자격으로서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덴마크군은 영국과 프랑스의 무력지원을 믿고이것은 착각이었다. 영국은 개입의사가 없었고 프랑스는 주저하고 있었다.무력으로 병합했고,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은 연합하여 이를 이유로 덴마크 공격을 시작했다.
결국 오스트리아․프로이센군이 승리를 거두었고 두 지역을 양국이 공동관리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맺는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이 관련되고 독일 내부 일이므로 간섭안하고 프랑스는 멕시코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지역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공동관리하기로 한 것은 비스마르크의 치밀한 계산이었다. 이 문제를 이용하여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여 오스트리아를 독일연방에서 축출하려는 불씨를 남겨둔 것이다.
이 술책에 넘어간 오스트리아는 두 지역을 탐내어 먼저 두 지역의 분할을 요구했으나, 프로이센은 양국의 공동관리를 주장한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 보이게 됐고, 프로이센은 독일 민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결국 가스타인 조약 (1865년 8월 13일)으로 홀쉬타인은 오스트리아로 가고 쉴레스비히는 프로이센이 차지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이제 외교 공작을 벌인다.
[편집] 비아리쯔 회담과 이탈리아와 군사동맹
대(對)오스트리아 전쟁을 위해서는 프랑스가 중립을 지켜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비스마르크는 비스마르크는 비아리쯔에서 나폴레옹3세를 만나 그의 허영심을 부추켜 중립을 요구한다. 그는 섭섭하지 않게 보상하겠다는 애매한 약속을 했고 기록을 일부러 남기지 않았다. 나폴레옹 3세는 룩셈부르크와 벨기에의 양도를 생각했다. 이 회담은 나중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불씨이기도 했다. 비스마르크가 고의적으로 조장한 것이다. 일단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위해서 프랑스의 중립을 받아낸 것으로 만족하였다. 게다가 이 무렵 프랑스는 멕시코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어서 유럽 대륙의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처지였다.
프랑스의 중립을 확보하고서도 비스마르크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좀더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는 오스트리아군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아직 베네치아를 확보하지 못해 오스트리아에 대한 감정이 안좋은 이탈리아를 끌어들이게 된다. 지지부진한던 협상은 나폴레옹 3세가 보증을 서는 바람에 3개월 이내에 프로이센이 전쟁을 일으키면 이탈리아는 즉각 양면전을 벌이기 로하고 대신 베네치아를 이탈리아가 차지하기로 한다. 이것이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으로서 1866년 4월 6일에 체결되었다. 전쟁은 이로부터 3개월 후에 시작되었다.
[편집] 당시 국제상황
이로써 프랑스는 중립이고 러시아는 친프로이센적이며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프로이센의 군사동맹국으로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프로이센군도 준비 완료 상태였다. 남은 것은 전쟁뿐이었다.
[편집] 경과
- 1866년 4월 9일 : 프로이센,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에 연방개혁안제출.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북독일연방을 만들자“
- 1866년 6월 : 오스트리아의 홀쉬타인 총독이 공국의 장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의회를 소집. 프로이센은 이를 가스타인 협정 위반이라고 비난
- 1866년 6월 17일 : 오스트리아 선전포고
- 1866년 6월 18일 : 프로이센 선전포고
- 1866년 6월 20일 : 이탈리아 대오스트리아 선전포고 ⇒ 오스트리아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어서 단독으로 전쟁수행
- 1866년 7월 3일 :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 괴멸
- 1866년 8월 23일 : 프라하 조약 체결. 오스트리아 항복
[편집] 뒷 이야기
승리에 취한 프로이센 군부는 빈으로 진격을 주장했고, 빌헬름 1세도 이것을 바랐다. 오랜동안 오스트리아에 억눌려왔던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빈에서 승리의 퍼레이드를 벌이길 원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생각은 달랐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에 굴욕감을 주어서는 안되며 나중에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할 때 최소한 중립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을 지켜주어 복수심을 갖지 않게 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황태자의 도움과 사표 위협으로 이를 관철시킨다. 대프랑스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역할을 미리 내다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