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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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수(林和秀; 1921년 ~ 1961년 12월 21일)는 정치깡패이자 영화인이다.
[편집] 생애
경기도 여주군 출신으로 본명은 권중각이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임씨로 하고 이름을 화수라 하였다. 21살 때 소매치기로 개성형무소에서 2년, 24살 때 장물취득혐의로 2년을 더 옥살이하였다. 학력도 없고 배운 게 없다고는 하지만 극장을 좋아하여 극장 주변에서 일을 하여 생계를 꾸렸다. 광복 후 그는 서울의 미나도극장(평화극장)을 인수받았으며 점차 영화계의 대부로 급부상하였다.
이정재와의 인연으로 그와 더불어 동대문 사단의 제2의 맹주로 떠오른 임화수는 비록 정치깡패이기는 했지만 영화방면에 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천지유정》(1957)이라는 영화를 홍콩과 합작해서 만드는 국내최초의 외국합작영화를 만들어냈으며, 또 《길 잃은 사람들》,《사람팔자 알 수 없다》 등의 영화 15편을 제작해 거금을 번다. 하지만 반공예술인단을 조직해 단장이 되어 자유당 정권과 더욱 밀착했으며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이승만의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폭력을 함부로 행사하여 그에 대한 평이 당연히 좋지 않았다. 특히 김희갑의 갈비뼈를 뿌러뜨린 이른바 김희갑 구타사건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언론의 화제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또 그는 이정재가 물러난 동대문 상인연합회의 회장자리를 이어 받고 반공청년단에 가입했으며, 유지광 등에게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반대를 외치는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공공연한 정치테러를 지시하였다.
1960년 4월 18일, 시위를 하고 돌아가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집단으로 구타, 많은 대학생들을 살상하게 하는 이른바 고대생습격사건을 지시하였다. 이 때문에 훗날 5.16 군사정변 후 그가 사형당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고대 습격 사건은 임화수 머리에서 나온 사건입니다.)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자 정치깡패로 몰려 체포되었다. 5.16 군사정변 후 혁명재판에서 이정재 · 유지광 · 최인규 · 곽영주 · 신정식 등과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1961년 12월 21일에 서울형무소 형장에서 곽영주 · 최인규 등과 함께 교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