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서 킹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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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서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1929년 1월 15일 ~ 1968년 4월 4일)는 미국내 흑인의 인권 운동을 이끈 개신교 목사이다. 그의 인권 운동 활동은 1964년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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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유년기 - 청년기
1929년 조지아 주 애틀랜타시의 침례교 목사 마이클 루서 킹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마이클과 같은 이름이 붙여졌지만, 아버지가 1935년 마틴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마틴이 이름이 된다. 1955년 진보적인 학풍의 보스턴 대학교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에서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신앙으로 신앙성격이 바뀐다. [1]
이름이 바뀌게 된것은 호적상의 기록의 오류였다. 그가 여권을 만들려 할 때까지 잘못된 이름을 사용하다가 여권 발행시 원래 이름인 마틴 루서 킹 2세로 호적상 오류를 법적으로 정정한 것이다.
[편집] 시민권 운동
1954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덱스터 애버뉴 침례교회 목사를 맡게 된다. 당시 루서 킹은 침례교 목사안수는 받았지만, 모어하우스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목과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55년 12월 몽고메리에서 로자 팍스라는 흑인여성이 버스에서 백인 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체포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을 계기로 펼쳐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지도하고, 1956년에는 미국 연방 최고 재판소에서 버스 내 인종 분리법의 위헌판결을 얻어낸다. 이후 애틀랜타의 침례교회 목사로 있으며 미국 각지의 인권운동을 지도했다. 당시 루터킹 목사와 같이 인종차별반대운동에 참여한 동역자로는 장로교목사인 윌리엄 슬로언 코핀 목사(1924년-2006년)이 있다.
루터킹 목사는 1963년 4월 12일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열린 항의 데모 때 스스로 버밍험 시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4월 19일까지 구치소의 독방에 투옥되었다. 이 해 워싱턴 대행진때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행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인종 차별의 철폐와 각 인종간의 공존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간결한 문체와 평이한 말로 호소해 넓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 연설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유명하다.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는 멤피스시의 청소부들이 파업을 벌이자,“자신이 지닌 엄청난 자원을 빈곤을 종식시키고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기본적인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미국도 역시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노동자로서의)평등한 대우를 받고 싶다면, 적절한 임금을 받고 싶다면 투쟁해야 합니다.”라는 연설을 하였다. 이러한 킹 목사의 활발한 사회운동은 우익을 자극하여, 당시 FBI국장이자 우익인사였던 에드거 후버는 루서 킹 목사를 위험인물이라고 규정, 활동내역을 감시하였다.
[편집]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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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주석
- ↑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신학생때 사회과학서적을 읽으면서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빈민가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경제적인 조건,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사회적인 조건에는 무관심한 채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종교는 사멸하게 된다. ”면서 기독교인의 신앙실천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앙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