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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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로마 共和政)은 고대 로마의 공화정 체제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대략 기원전 509년 고대 로마의 왕정이 무너진 시기부터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 황제로 되기까지의 기간동안의 고대 로마를 말한다. 정확히 언제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진입했는지에 대하여는 역사가들의 견해가 달라지지만 대체로 다음의 몇가지 역사절 사실들이 공화제에서 로마 제국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사실상 제정이 시작되었음에도 자신들은 공화정 체제하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공화정의 종말에 대한 정확한 정의에 대하여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목차 |
[편집] 로마 공화정의 정치체계
- 이 부분의 본문은 고대 로마의 관직과 칭호입니다.
로마 공화정의 정치체계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공화정의 행정을 이루는 기관을 설명하겠다. 단, 자세한것은 로마 공화정의 구조를 참조하면 더욱 좋다.
[편집] 집정관
- 이 부분의 본문은 집정관입니다.
왕정에는 왕이 있다면, 로마 공화정에는 집정관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집정관은 2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기는 1년이다. 단, 재선이 허용되며 40세 이상만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취임할수 있다.
집정관은 2명중 1명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정책이 시행되지 못하며 민회(평민들과 귀족이 같이 참여한다.)를 소집할 권리가 있다. 또한, 군대를 지휘할 권리도 있다.
또한, 친위군 12명이 따를수 있는 권리도 인정된다. 그리고 전쟁도 수행할수 있다.
[편집] 독재관
- 이 부분의 본문은 독재관입니다.
공화정의 거의 모든 관직이 선거로 선출되지만, 독재관만은 집정관중 1명이 지명한다. 임기는 집정관 임기의 반인 6개월이다. 국가에 비상사태(식량 위기, 전쟁등)가 선포되거나 두 집정관이 서로 대립하여 의사 결정이 되지 않을 때등에 임명되며, 독재관이 행사하는 권력에는 호민관의 거부권조차 통하지 않는다.
집정관이 친위군 12명을 거느릴수 있는 반면에, 독재관은 24명을 거느릴수 있다.
[편집] 법무관
법무관은 집정관과 마찬가지로 1년의 임기이며, 공화정 초기에는 1명이었으나 공화정 말기에는 16명으로 늘었다. 전쟁터에 나간 집정관의 임무를 대행했으나, 점점 사법 책임관으로 변화해 갔다. 연령도 40세 이상만 입후보 할수 있었으며, 집정관과 마찬가지로 비상시에는 군대를 지휘할 권한이 있었다.
[편집] 회계감사관
정원은 처음에는 두명이었으나, 말기에는 40명으로 늘었다. 임기는 1년이고, 연령 제한은 30세였다. 회계감사관은 전쟁터에서의 재무를 담당했다. 회계감사관은 정계에 들어가는 임용문과 거의 같았다.
[편집] 재무관
원래는 인구조사를 맡기기 위해 창설되었으나, 점차 재정상태를 정직하게 신고하지 않은 자를 귀족이든 평민이든 상관없이 고발할 수 있는 권한으로 가지고 있게 변질되었다. 임기는 1년 6개월이었다. 국유지 운용과 국고 출납, 도로나 상하수도 건설을 위한 돈의 출납을 담당했다.
[편집] 행정관
설립 당시부터 귀족 2명과 평민 2명으로 명확히 하고 선출했다. 임기는 1년이며, 30세 이상만 출마할수 있었다. 주로 축제행사의 연출, 치안유지, 도로의 보수와 교통 정리, 상하수도 관리를 맡았다.
[편집] 호민관
- 이 부분의 본문은 호민관입니다.
평민의 대표격이었으며, 이는 민회가 아닌 평민회에서 선출되었다. 임기는 1년이고, 연령제한은 없었다. 집정관과 원로원이 결정한 일에 거부권을 행사할수 있었으나, 위에서 언급한대로 독재관이 임명되었을때는 행사할수 없었다.
처음에는 2명이었으나, 점차 10명으로 증원되었다. 호민관 임기 종료시 자동으로 원로원 의석을 배정받을수 있었다.
[편집] 원로원
- 이 부분의 본문은 원로원입니다.
원로원이라고 말하는 늙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오해할수 있는데, 30세부터 원로원에 의석을 가질수 있었다. 임기는 종신이었다. 원로원은 집정관이 하는일에 간섭할수 있었으며,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권고를 통해 모든 권한을 독재관에 양도할수 있었다. "원로원 최종권고"는 재판없이 사형할수 있게하는 권한 등 방대한 권한을 양도할수 있었다.
그런데, 집정관과 법무관은 임기가 1년이라 전쟁수행중 임기가 끝날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따라 전쟁 총사령관을 되도록 바꾸지 않기 위해 임기 종료 후에도 전쟁 수행시에는 각각 '전직 집정관'과 '전직 법무관'으로 임명해 전쟁을 수행하게 했었다. 이게 끝난후 로마의 식민지에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정치체계는 당시에도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도 혁신적이었으며, 그것은 무려 1900년대 까지에도 혁신적이었다. 선거로 인한 통치자 선출은 중세시대에도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로마 공화정은 독재관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될수 있었다. 단, 귀족이 선출될 가능성은 명성등으로 인해 가능성이 훨씬 많았다.
[편집] 로마 공화정의 구조
로마 공화정을 구성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민이다. 시민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는데 로마법아래서 여러가지 권리와 의무를 진다. 로마 공화정의 정부체계는 로마의 전통에 입각한 다음의 세가지 구조가 주요 골격을 이룬다.
다음은, 로마 공화정을 구성하는데 중요한 법률의 일부분을 간략히 소개한다.
[편집] 12표법
12표법은 로마 최초의 성문법으로서, 평민들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편집] 리키니우스법
집정관 2명중, 1명을 평민가운데서 선출하게한 법률로서, 평민들의 권리가 더욱 신장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편집] 호르텐시우스법
거의 12표법과 리키니우스법을 포함하는 법으로서, 평민회(여기서 말하는 평민회는 귀족과 평민이 같이 참여하는 민회와 구별된다.)에서 가결한 법률을 그대로 시행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되어 귀족들의 권한은 상당히 위축된 반면 평민들의 권한은 상당히 신장되었다.
결국, 이 세개 법률은 로마 공화정을 이끌어가게 되는 중요한 법률중 하나로 볼수 있으며 또한, 평민들의 권리도 신장되는 중요한 법률이다.
[편집] 역사
[편집] 로마의 건국과 왕정시기
- 이 부분의 본문은 로마 왕정입니다.
로마의 기원과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전설과 신화에 단편적으로 역사적 실체가 숨어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로마 신화에 따르면 기원전 12세기에 트로이의 왕자 아이네아스가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 라티움에 자리잡고 로마의 터를 세우고, 그의 손자 로루스가 알바 롱가를 세웠으며 나중에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가 로마시를 세웠다고 한다.
로마는 기원전 7세기에 에트루리아의 세력 아래로 들어갔고, 기원전 550년경에는 에트루리아족에게 직접 통치를 받았고 빠르게 성장하여 라티움에서 주도적인 도시국가로 성장했다.
초기에 로마는 왕국이었다. 왕은 세습제가 아니고 여러부족의 모임에서 선출하는 제도였다. 로마의 왕은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수장으로 기능했다.
[편집] 로마 공화정의 성립
대체로 기원전 509년 로마는 왕정을 끝내고 공화정 체제로 변경된 것으로 본다. 이 연대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체로 이 시기를 전후로 로마는 집정관이 왕을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집정관은 왕이 가지는 모든 권한을 가졌는데 단 카피톨리나 언덕의 신성한 신전에서 유피테르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제사만큼은 직접 수행하지 못했다.
집정관은 2명이 임기가 1년으로 원래 평민도 집정관이 될 수 있었지만 귀족이 나중에는 귀족계급이 독점했으며 4세기 중엽에 이르러 한명은 평민출신의 집정관이어야 한다는 법이 제정되었다. 또한 평민들은 늘어나는 토지의 보유를 주장하며 기원전 494년 호민관직을 만들었고 호민관은 권력 남용으로 피해를 본 평민을 돕고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어 호민관은 10명으로 늘어나고 기원전 287년 만들어진 호르텐시우스법은 평민의 의회인 민회에 입법권까지 부여하게 했다.
[편집] 로마의 팽창
[편집] 이탈리아의 통일
로마는 국력이 미약할때 라틴 동맹의 일원으로 있었으나 나중에는 동맹을 헤체하고 이탈리아의 완전한 주도권을 쥐었다.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경 로마는 주변 부족들과의 일련의 전쟁을 치르고 점점 그 영역을 확대하였다. 아펜니노 산맥 중부에 살던 여러 종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에트루리아의 베이를 손에 넣었다. 기원전 390년에는 켈트족의 침입을 받아 로마시가 함락당하는 피해를 입고 도시의 완전한 함락을 막기 위해 보상금을 물어야 했다. 켈트족이 북쪽으로 물러가자 로마는 라틴 동맹의 내분을 틈타 라티움의 이웃 도시들을 차례로 제압했다.
로마는 기원전 343년부터 약 기원전 290년까지 삼니움족과 세차례의 전쟁을 치루었고 모두 승리했다.
- 제1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43년 - 기원전 341년) : 라틴 동맹 해체, 라티움 지배.
- 제2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26년 - 기원전 304년) : 캄파냐획득
- 제3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298년 - 기원전 290년) : 에트루리아족·켈트족·삼니움족이 연합군 격파 에트루리아 전역 지배
로마가 중부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남쪽으로 눈을 돌리자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그리스계 도시였던 타렌툼은 로마의 침공을 받고 에페이로스의 피로스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기원전 293년 피로스는 이탈리아를 침공해 로마군을 패배시키고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를 빼앗았지만 로마공화정을 완전히 패배시키지 못하고 퇴각해야만 했으며, 그자신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타렌툼은 결국 로마에게 항복했고 이탈리아를 통일한 로마는 지중해와 헬레니즘 세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편집] 포에니 전쟁
- 이 부분의 본문은 포에니 전쟁입니다.
[편집] 헬레니즘 세계의 정복
- 이 부분의 본문은 마케도니아 전쟁입니다.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로마는 4번에 걸친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모두 승리하고 결국 기원전 146년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는 기원전 146년 반란을 일으킨 코린트를 완전히 말살했고 카르타고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이시기 로마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세력을 서로 견제하고 지중해의 많은 섬들을 정복했으며 점점 그 판세를 넓혀 갔다.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3세는 유언으로 모든 페르가몬 왕국의 영토를 로마에게 넘겼고 로마는 이를 아시아 속주로 개편하였다.
[편집] 권력의 불안과 내전
- 이 부분의 본문은 로마 공화정과 정치 폭력입니다.
[편집]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삼두정치
[편집] 로마공화정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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