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18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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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정(金潤晶, 일본식 이름: 淸道金次郞[1], 1869년 ~ ?)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본관은 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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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한성부 출신으로 구한말에 대한제국의 학부가 선발한 유학생으로 뽑혀 1897년부터 미국에 유학했다.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를 1903년 졸업한 뒤 주미공사관에서 서기생, 참서관, 대리공사 등을 지내며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긴 뒤 귀국했다. 태인군 군수를 거쳐 1906년 인천부윤으로 발령받았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1896년 치하포에서의 일본인 살인 사건으로 인천에 압송된 김구가 김윤정에게 심문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2], 손세일은 김윤정의 나이와 유학 시기, 인천부윤 발령 시점을 고려할 때 연대가 맞지 않는다며 이를 김구의 착각으로 보았다.
이후 관립인천실업학교의 교장직을 맡았다가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 개화파 친일 관료로서 등용되어 조선총독부의 전라북도 참여관에 임명되었고, 1921년 경기도 참여관, 1925년에는 충청북도 도지사를 지냈다. 1926년 도지사 직에서 퇴임한 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처음 임명되었으며, 이후 참의직을 6차례나 연임하다가 광복 직전인 1945년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1935년 편찬된 총독부의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올라와 있다.[3][4]
윤치오의 부인이며 한국 최초로 양장을 입은 여성이라는 설이 있는 윤고라가 김윤정의 딸이다[5] 윤고라는 본래 김씨이나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꾸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두 명단에는 사위 윤치오도 포함되어 있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자료
- 손세일, 孫世一의 비교 傳記 (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월간조선》 (2002년 2월호)
[편집] 주석
- ↑ 백기완, 송건호, 임헌영 (2004년 5월 20일). 《해방전후사의 인식 (1)》. 서울: 한길사, 223쪽. ISBN 8935655422.
- ↑ 김구, 《백범일지》 상권 - 1.2 기구한 젊은 때
- ↑ 성강현.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일요시사》, 2004년 3월 18일. 2008년 4월 16일에 읽어봄.
- ↑ 성강현.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일요시사》, 2004년 3월 18일. 2008년 4월 16일에 읽어봄.
- ↑ 이강필. "20세기 한국의 풍물 풍속사⑫ 옷 - '미니스커트 단속' 그 때를 아시나요", 《뉴스플러스》, 1999년 4월 1일. 2008년 4월 12일에 읽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