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바오로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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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6세(라틴어: Paulus PP. VI, 이탈리아어: Papa Paolo VI)은 제262대 로마 교황이다.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엔리코 안토니오 마리아 몬티니(이탈리아어: Giovanni Battista Enrico Antonio Maria Montini)이다.
[편집] 생애
바오로 6세는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에서 부유한 상류층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지오반니는 연약하고 수줍음이 많았으나 성실하였다. 초등교육을 마친 후 신학교에서 철학 및 교회법, 문학에 대한 교육을 받은 다음 1920년 5월 20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22년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 들어가 수학한 후 1931년부터 국무성성 일을 하면서 외교관 학교에서 교황청의 외교 역사를 강의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교황청의 명을 받아 구제 사업에 힘쓰고 전쟁 포로, 난민, 양심수를 보호해 주었다. 또한 미국과의 연락 업무도 맡았다.
1954년 11월 1일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1958년 12월 15일 추기경이 되었다. 1963년 6월 3일 교황 요한 23세가 서거한 후,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 직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속 이끌어 1965년 10월 28일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NOSTRA AETATE)을 발표하여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천명하고 같은 해 12월 8일 절찬리에 폐회하였다.
바오로 6세는 일종의 권위주의자였다. 그는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와 동시에 전제군주적인 통치방식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심각했다. 마르셀 르페르브를 선두로 한 보수주의 진영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다른 교파들과 종교에 대해 개방성을 보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진보주의 진영에서는 교회의 전통과 이론의 중요한 요소들을 과감히 던져버릴 자세가 되어 있었으며,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해방신학을 통한 사회구원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구원은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보았으며, 하느님은 가난한 자들을 편애하신다고 보았다. 또한 가톨릭교회내 권위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
바오로 6세는 이 두 가지 입장 중에서 어느 것을 지향해야 할지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속 이끌어 공의회에서 처리하도록 하면서도 가톨릭 성직자들의 독신 문제와 피임 문제에 대해서는 공의회에서 다루지 못하도록 하는 등 일관성이 결여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이는 논란을 불러왔다. 공의회가 다루지 못할 주제가 뭐가 있겠느냐, 또는 이 두 주제는 오직 교황만이 다룰 수 있다고 한다면 다른 문제들도 굳이 공의회에게 맡길 필요가 있느냐 등의 논쟁이 촉발되었다. 이 같은 논란은 교황의 권위를 강화시키지도 못한 채 공의회의 권위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교황의 권위가 평가절하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 교회 안에서 권위의 실질적인 근원은 어디에 놓여있는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정치 영역에서 바티칸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철저하게 그 영향력을 상실해 갔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기민·기사 연합(CDU·CSU)과 국민당(OVP) 등이 다수당의 지위를 잃었다. 새로운 좌파 정부들은 즉각 법을 개정해서 이혼과 낙태, 포르노그래피 등을 합법화했다. 프랑스에서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연합한 국민전선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기민당과 공산당 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는 유럽의 마지막 파시스트라고 불리는 군부독재자 프랑코와 교수출신의 독재자인 살라자르 하의 가톨릭·권위주의 독재정권이 붕괴했다. 알바니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등의 스탈린주의 통치 국가에서는 반종교정책으로 교회는 창고나 박물관 등으로 쓰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는 중국공산당치하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국 천주교회가 삼자정책에 의해 바티킨과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지금도 중국삼자애국천주교회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당히 많은 개혁을 단행했고,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타파했다. 교황 개인을 둘러싼 의례적인 과시도 현저하게 축소했다. 1970년에는 팔라틴 근위대와 명예 근위대 역시 해산시켰으며, 교서에 의거해 많은 군주제 제식도 철폐했다. 추기경이 착용하던 어민 모피와 커다란 모자도 없어졌다. 또한 교황궁의 전시품은 동시대 예술작품으로 교체되기도 했다. 그리고 평신도, 정의와 평화 문제, 그리고 다른 종교 및 무신론자와의 대화를 위한 평의회가 도입되었다. 교황 자문기관으로 주교 시노드를 창설했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교 퇴직 연령을 75살로 확정했으며 나아가 교황 선출권을 가진 추기경의 나이도 80살 미만으로 제한했다. 특히 바티칸에 비(非)이탈리아인의 숫자를 늘려서 이탈리아인 특유의 비효율적 운영방식을 보완하고자 했다.
더불어 바오로 6세는 재위 초기부터 개신교와 성공회에서 세계 교회 협의회 결성을 통해서 시작한 교회일치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형제임을 강조하여 동방 정교회의 총대주교들과 만나는 한편,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 아서 M. 램지의 방문도 받았다. 1964년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등 세계 각국을 방문하였다. 대한민국의 순교자 24위를 추가로 복자에 추대하고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에 서임하였다.
바오로 6세가 개혁한 것은 종교적인 부분에 그치지 않았다. 사회적인 부분에서 그는 빈민 구제 사업과 고아원, 병원, 양로원, 교도소 등을 위한 사회 사업을 운영하였다.
전 임 요한 23세 |
제262대 교황 1963년 6월 21일 - 1978년 8월 6일 |
후 임 요한 바오로 1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