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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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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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3세(라틴어: Leo PP. XIII, 이탈리아어: Papa Leone XIII)는 제256대 로마 교황(재위: 1878년 2월 20일 - 1903년 7월 20일)이다. 속명은 조아키노 빈첸초 라파엘 루이지 페치(이탈리아어: Gioacchino Vincenzo Raffaele Luigi Pecci)이다.
[편집] 생애
1810년 3월 2일 이탈리아 중부 카르피네토 로마노에서 가난한 귀족 집안의 일곱 자녀 중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842년 교회귀족학원에 입학하여 사피엔차 대학교에서 신학과 교회법 그리고 시민법을 공부하였다. 1837년 신부로 서품되었다. 콜레라 전염병이 만연할 때 처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그를 이듬해 1월 교황령의 베네벤토에 사절로 임명하였다.
1845년 페루자의 대주교가 되었다. 1859년에 일기 시작한 이탈리아 혁명 운동 기간에는 교황청의 세속권을 옹호하고 이탈리아 정부의 반(反)종교 정책에 대항하였다. 1877년에 페루자 교구장으로 있으면서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교황 비오 9세의 선종 후에 개최된 콘클라베에 참석하여 교황으로 피선되었다.
레오 13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로마 문제에 정면 도전하였다. 여러 번 시도한 후 실패하자 직접 이탈리아 왕과 대면하였다. 이탈리아 정부에서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게 선거 기권을 요구하고 로마 가톨릭에 대한 이탈리아 왕국의 모든 타협을 금지하며 교황청의 영토 권리 폐기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파문을 선언하였다. 그는 로마 문제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하였고 교황 비오 9세의 치세 말기에 일어났던 여러 나라와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국제 정치에서도 레오 13세는 많은 난관에 부딪혔지만 끈질기게 버텼다. 교황제도가 다시 전세계적인 의미를 어느 정도 창출할 수 있도록 능란한 외교술을 발휘했다. 그는 전임 교황 비오 9세가 교황령을 잃어버리고 난 후 몰렸던 막다른 길에서 출구를 찾아야 했다. 독일 제국에서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이 거의 광분 상태였다. 레오 13세는 독일에서 교회가 거대한 권력에 의해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자 했다.
비스마르크가 실용주의적인 이유에서 다툼이 심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자, 레오 13세는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독일 내 주교들과 로마 가톨릭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태에 개입했다. 분쟁은 상호 양보 하에 완화되었다. 1882년 프로이센 사절이 다시 교황청에 파견되었다. 국제적인 존경을 받기 위해 노력하던 레오 13세에게는 적어도 부분적인 성공이었다. 독일 제국 전체는 아니지만 적어도 제국을 주도하는 프로이센과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교회를 더이상 함부로 다루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독일 제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로마 가톨릭 신도들과의 싸움을 지속하길 원하지 않았던 비스마르크는 강한 의욕에 차고 지적인 이 교황에게 개인적으로 공감했다. 관용의 제스처로 1885년 비스마르크는 태평양에 있는 캐롤라인 군도를 둘러싼 독일과 에스파냐의 갈등에서 중재 역할을 교황청에 제안했다. 교황청의 현명한 중재 판결로 다툼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1888년 10월 12일 개신교 신도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이탈리아 여행 중에 교황청을 방문한 일은 독일과 교황청의 화해를 결정적으로 확인해 준 사건이었다.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반(反)교권주의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1880년 벨기에의 학교법은 바티칸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 13세는 비타협적인 로마 가톨릭 신도들을 초대하여 국법을 수용하게 하였다. 바로 이 때 로마 가톨릭 정당이 창설되어 1884년 선거에서 승리하자 바티칸과의 외교 관계를 다시 정상화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 대하여 레오 13세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게 제3공화국을 받아들이게 하였으나 대통령이 사임하자 정부는 다시 로마 가톨릭에 대한 투쟁을 개시하였다. 이혼을 허락하고 종교 교육을 추방하며 수도회가 운영하던 1만여 개의 학교들을 강제로 폐쇄시켰다. 1905년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러시아 제국과의 협상을 통해서는 억압받는 폴란드를 위해 몇 가지 양보를 얻어냈고 폴란드의 문화적 몰락을 막았다.
1881년 바티칸 문서고를 개방하여 역사학자들이 연구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893년 성서 주석에 넓은 길을 열어 주었고 1902년에는 교황청 성서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891년 공표된 그의 사회 회칙 《새로운 사태》는 교황 제도가 노동운동 진영으로부터 처음으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주었다. 레오 13세는 이 회칙에서 교회는 결코 귀족과 착취 계급의 동맹이 아니며 노동자의 적법한 요구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이후로 레오 13세는 ‘노동자의 교황’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의 재위 중에는 서구 열강들의 식민주의 정책이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병폐 중의 하나는 노예제도였다. 이를 폐지하기 위해 레오 13세는 1885년과 1890년에 각각 두 개의 칙서를 발표하였다. 레오 13세는 국제 사회에서 교황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1899년 헤이그 평화 협의회에는 이탈리아 정부의 반대로 교황의 초청이 거절되어 로마 문제는 국제적인 도움을 얻지 못하였다.
사회의 조직과 종교와 국가의 관계, 즉 정치적 권력에 대해서는 일체의 지배를 없애고 모든 지배에 대하여 절대적인 반항을 선언한 무정부주의를 단죄하였다. 또한 지배를 약화시키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선언하는 자유주의도 배척하였으며 민중의 주권을 권위의 궁극적이고 유일한 원천이라고 보는 민주주의를 배격하였다. 레오 13세는 그레고리오 16세와 비오 9세에 의해 단죄된 자유주의의 원칙을 재확인하였다. 그의 칙서들은 교회와 국가 사이에 권위와 고유한 일치의 기원은 신적인 것임을 재확인하였다. 더구나 교회는 어떤 정부와도 적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특히 레오 13세는 공동선의 관점에서 현존하는 제도를 수용하고 정치에 참여하며 출판의 자유로운 제도를 이용하여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신자들이 의회에 참여하도록 촉구하였다.
프리메이슨에 대해서는 악마의 활동이라며 공식적으로 비난하였다.
[편집] 바깥 고리
- Pope Leo XIII texts and biography
- Pope Leo XIII in the Catholic Encyclopedia
- Pope Leo XIII, overview of pontificate
- Etexts of his encyclicals and other documents
- Pope Leo X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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