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다마소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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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소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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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다마소 1세(라틴어: Sanctus Damasus I, 이탈리아어: Papa Damaso I)는 제37대 로마 교황(재위: 366년 10월 1일 - 384년 12월 11일)이다.
[편집] 생애
다마소 1세가 교황이 되기 전의 생활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교황 리베리오와 함께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다. 아버지 안토니우스는 히스파니아 출신으로 사제였으며 어머니는 라우렌티아였다. 유배지에서 로마로 귀환한 후 다마소는 대립교황 펠릭스 2세를 지지하였으나 펠릭스가 죽은 후 리베리오와 화해하였다. 리베리오의 선종 후 교회 안에 후임자 선출을 두고 큰 소란이 일어났을 때 부제 우르시노가 티부르의 주교 파울루스에 의해 주교로 성성되었으나 다수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다마소를 지지하여 오스티아의 주교에 의해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성성되었다. 그 이후에도 우르시노의 지지자들과 소란스러운 일들이 있었으나 로마 제국의 황제의 개입으로 그 일당은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그 이후에도 우르시노 일당은 아리우스파와 결속하여 다마소 1세를 괴롭혔다.
다마소 1세의 재위 중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다마소 1세는 재위 초기부터 아리우스주의자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교리적으로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황후 유스티나의 정치적인 힘을 업고 중요한 교구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다른 소수의 분열자들도 있었다. 369년 일리리쿰의 두 주교 우르사치우스와 발렌스를 파면시키고 밀라노의 주교 아욱센티우스에게도 조치를 취하였다. 밀라노에서 성 암브로시오는 다마소 1세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여 아리우스주의를 공격하였다. 378년 개최된 로마 교회회의에서 결정된 중요한 사항 중의 하나는 주교들은 일반 재판소의 심리를 받지 않고 같은 성직자의 심문이나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 면제권은 영구히 보존되었다.
동방교회와는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삼위일체에 관한 용어를 놓고 카에사리아의 바실리오스와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의 논쟁은 계속되었다. 안치라의 마르첼로가 제기한 이단적 삼위일체 논쟁은 374년 그의 죽음으로 끝났고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스의 이단적 그리스도론은 375년 공적으로 단죄되었다.
다마소 1세는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 공의회는 대단히 중요하다. 아리우스주의가 단죄되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 선서문이 공적으로 채택되었다. 다마소 1세는 공의회의 세 번째 규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치적 원리에 기초를 두고 새 로마로 불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에 로마 다음 가는 영예와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382년 로마 공의회에서 다마소 1세는 문제의 그 규정을 도외시하고 로마 주교좌의 우위성은 의심 없이 성 베드로의 계승에 명확하게 근거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다마소 1세는 로마 교황청의 문서고와 상서원 확대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전례 개혁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라틴어가 이 때부터 로마 가톨릭에서 전례의 주용어가 되었다. 성 예로니모가 377년 다마소 1세의 비서가 되어 그리스어로 된 성서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382년 로마 공의회의 인준을 받았다. 다마소 1세는 건축 외에도 순교자들의 공경에도 열성적이어서 카타콤베의 순교자들의 묘소를 복구하고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다마소 1세는 4세기의 위대한 교황들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전 임 리베리오 |
제37대 교황 366년 10월 1일 - 384년 12월 11일 |
후 임 시리치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