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잘루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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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잘루트 전투 (몽골 원정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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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맘루크 왕조 | 몽골 제국 | ||
지휘관 | |||
사이프 아딘 쿠투즈 바이바르스 |
키트부가 | ||
병력 | |||
약 20,000~30,000명 | 약 10,000~20,000명 |
아인잘루트 전투(영어:Battle of Ain Jalut(혹은 Ayn Jalut, 아랍어: عين جالوت, the "Eye of Goliath" 혹은 "Spring of Goliath")는 1260년 9월 3일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 아인잘루트에서 쿠투즈가 이끄는 맘루크 왕조군이 키트부카가 이끄는 시리아 주둔 몽골제국군 및 크리스트교도 제후연합군을 격파한 전투로써 이 전투의 승리로 몽골제국의 서쪽진출이 멈추게 되었다.
[편집] 경과
아인잘루트에서 맘루크 왕조군과 격돌한 몽골군은 훌라구가 총사령관으로 있던 몽골제국의 서아시아 원정군에 속한 한 부대이다.
1253년에 편성된 훌라구의 원정군은 서쪽으로 진출을 계속해, 1258년 바그다드을 점령하여 수니파 이슬람 사회에서 가장 권위가 있던 아바스 왕조을 멸망시켰다. 원정군은 유목지역으로 가장 최적지였던 아제르바이잔 방면으로 진격하던 중 1260년 시리아 북부로 침공하여 알레포을 점령했다. 몽골군에게는 십자군이 시리아 북부에 세웠던 크리스트교도의 여러 정권 및 키리키아-아르메니아 왕국, 거기에 쟈지라-아나톨리아 방면의 이슬람교도의 여러 정권이 복속하였다. 그러나 알레포가 함락되었던 1260년 봄 훌라구의 형이며 몽골제국 대칸이었던 몽케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훌라구의 원정군은 서진을 멈추고 본국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훌라구는 귀환에 앞서 선봉부대을 맡았던 사령관 키트부가을 시리아에 남겼다. 키트부가는 아이유브 왕조의 정권이 남아있던 다마스커스을 점령하고, 아이유브 왕조의 이집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신 이집트을 지배하던 맘루크 왕조에게 항복권고의 사자를 보냈다.
그러나 맘루크 왕조의 술탄 쿠투즈는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키트부가는 휘하의 몽골군과 크리스트교 제후을 이끌고 맘루크 왕조을 침공했다. 맘루크 왕조의 앞에는 예루살렘을 잃고난 뒤 예루살렘 왕국이 근거지를 두었던 아크레가 있어 키트부가는 아크레에 도착했다.
키트부가의 남하소식을 접한 쿠투즈는 휘하의 맘루크을 이끌고 카이로를 출발했다. 맘루크 정권의 존폐위기에 몰리게 되자, 쿠투즈는 예전에 추방하여 시리아방면에서 유랑의 나날을 보내던 유능한 장군 바이바르스 등 반쿠투즈파의 맘루크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세시키고, 몽골군 휘하에 들어가는것을 싫어했던 아크레의 크리스트교도들은 중립을 지키기위해 맘루크 왕조군의 영내통과을 허락했다.
9월 3일 맘루크 왕조군과 몽골군은 가리라야의 구릉지대에서 격돌했다. 전장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어, 강을 가리키는 아라비아어로써 아인잘루트(골리앗의 샘)라 불려져서 이 전투를 아인잘루트 전투라고 부르게 되었다.
선봉대였기 때문에 1만 명 정도의 소수였던 몽골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한 맘루크군은 전군을 투입시키는것을 피하고, 곧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선봉대만을 몽골군 앞으로 진군시켰다. 바이바르스 부대에 비해 숫적으로 우세한 몽골군은 맘루크 왕조군에게 돌격하여 일거에 승패를 결정지으려고, 후퇴을 시작한 바이바르스 부대을 추격하다가 기다리고 있던 맘루크 왕조군 주력에 의해 포위공격당해 괴멸하였다.
몽골군 사령관 키트부가는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지 않고, 난전중에 전사했다. 시리아 주둔 몽골군 괴멸로 인해 맘루크 왕조군은 다마스커스, 알레포을 해방시키고 시리아을 몽골제국으로부터 탈환하였다.
[편집] 전투 후 상황 및 후세에 남겨진 영향
아인잘루트 전투 후, 맘루크 왕조군은 시리아을 북상하여 몽골군의 잔당 및 시리아에 재침입한 부대을 격파하는것을 계속해 시리아 거의 전역을 평정했다. 그러나 알레포을 회복할때쯤 이번 전투의 공로자였던 바이바르스와 총사령관 쿠투즈의 대립이 재연되었다. 바이바르스는 알레포의 총독에 임명되어 이 지방에서 자립할 야망을 갖고 있었으나, 쿠투즈는 바이바르스가 독립하여 자신의 지위을 위협할것을 두려워해 이것을 거부했다.
그 때문에 카이로로 돌아도는 도중에 바이바르스에 의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쿠투즈는 살해되고 바이바르스가 새로운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 되었다.
바이바르스는 몽골의 침공을 막아낸 영웅으로서 카이로에 개선하여 이집트,시리아의 왕으로써 확고한 지위을 쌓았다. 그 후에도 매년 벌어진 몽골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바이바르스는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약소자들이었던 맘루크들을 안정한 정권의 주인으로 상승시키는데 성공해, 사실상 맘루크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한편 아인잘루트 전투 이전에 귀환했던 몽골제국의 훌라구는 아제르바이잔의 타브리즈에 이르러, 둘째형 쿠빌라이와 동생 아리쿠브케가 칸의 지위을 놓고 내분이 시작되는것을 알고는 이 땅에 머물기로하고, 이란-이라크을 세력권으로 삼아 자립하였다. 이때부터 훌라구의 자손에 의한 세습이 이루어지게된 이란에 위치한 몽골정권을 일한국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인잘루트 전투의 결과 시리아는 맘루크 왕조의 영역이 되었고, 그 후에도 일 한국 왕조와 맘루크 왕조 사이에 이 지방을 둘러싼 대립이 계속되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양국의 각축전은 킵차크 한국(주치 우르스) 및 비잔틴 제국, 서유럽 여러나라을 포함시키게 되어, 13세기 후반을 통틀어 가장 치열한 외교전으로까지 번질 정도였다.
이 전투는 맘루크 왕조측의 역사가들이 남긴 동시대 아라비아어사료에서 현대 역사연구에 이르기까지 무슬림이 몽골제국군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처음으로 이들을 격파한 전투로써 매우 명성이 높다. 그러나 무슬림 정권의 군대가 몽골제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례는 이미 1221년 호라즘샤 왕조의 잘랄 웃딘의 군단이 시기 쿠토쿠 가 이끄는 3만기병을 격파한 아프가니스탄의 파르완 전투가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은 아니었다.
한편 집사(集史) 등 몽골제국 측의 페르시아어 사료에서는 전초전(前哨戦)이 아닌 국지전(局地戦) 취급을 받고 있었다. 몽골측 입장에선 이 전투에 참가했던 몽골제국군은 훌라구의 귀환으로 인해 시리아에 남아있던 주력군의 일부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기타 몽골제국군이 패배한 전투는 후일 몽골측에게 반격을 받아 패주하거나 괴멸당하는 상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아인잘루트 전투는 다른것에 비해 인상이 희박할 수 밖에 없다. 아인잘루트 전투가 인상적인 이유는 놀랍게도 그 후 몽골측의 정정(政情)이 놀랍도록 변화하여 시리아 탈환의 기회을 잃어버렸고, 결과적으로 이 지역은 맘루크 왕조 통치하에 있게되는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사실 일 한국 왕조는 1260년 이후 훌라구, 아바카 등은 킵차크 한국과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차가타이 한국과는 호라산 지역의 국경지역 분쟁에 신경을 썼기에 바이바르스가 지배하던 시리아 국경지역 침공에는 후속대책만이 되풀이 되었다.
역대 군주들 중에도 가잔 칸만이 시리아 지역에 여러차례 원정군을 파견하였으나, 대부분 군의 규모도 많아야 3만전후에 불과해 알레포 이남지역에 대한 정복엔 실패하였다. 쿠빌라이와 아리쿠브케의 제위계승분쟁 후에도 몽골제국 자체, 왕가간의 분쟁이 장기화가 계속되어 제국전체에 의한 군사행동이 불가능하게 된것도, 몽골측에 있어 시리아에 있던 잃어버린 영토 탈환의 기회가 사라지게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더 넓게 본다면 서방에게 있어 몽골제국의 끊임없는 확대가 정지된것이 아인잘루트 전투가 있던 1260년때 인것이 확인되고 있어 그 의미로써 매우 상징적인 전투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