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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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크(John Locke, 1632년 8월 29일 - 1704년 10월 28일)는 영국의 철학자다. 로크는 영국의 첫 경험론 철학자로 평가를 받지만, 사회계약론도 동등하게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사상들은 인식론과 더불어 정치철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가장 영향력있는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자유주의 이론가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들은 볼테르와 장 자크 루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 혁명 뿐만 아니라 여러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영향은 미국 독립 선언문에 반영되어 있다.
로크의 정신에 관한 이론은 "자아 정체성"에 관한 근대적 개념의 기원으로써 종종 인용되는 데, 데이비드 흄과 장 자크 루소 그리고 이마누엘 칸트과 같은 이후의 철학자들의 연구에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로크는 "의식"의 연속성을 통해 자아를 정의하려 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는 또한 정신을 "빈 서판"(백지 상태, 즉 "타블라 라사")으로 간주하였는 데, 르네 데카르트나 기독교 철학과는 다르게 사람이 선천적 관념(본유 관념 또는 생득 관념)을 지니지 않고 태어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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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로크의 생애, 무엇보다도 그의 젊은 시절에 관해 남아 있는 기록은 많지가 않다. 1632년 섬머셋셔(Somersetshire)의 작은 마을 라잉턴(Wrington)에서 법조인의 아들로 태어나다. 부모로부터 청교도식의 엄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며 유년시절은 브리스톨 근교의 펜스포드(Pensford)에서 보내다. 1647년 웨스트민스터 기숙사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다. 1652년 옥스포드 대학의 크리스트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언어, 논리학, 윤리학, 수학, 천문학을 두루 공부하면서 데카르트 철학을 처음으로 알게된다. 1656년 학사(Bachler of Art)를 받은 후 2년간 석사과정을 밟다. 1660년 옥스포드 대학의 튜터로 5년간 활동한 후 4개월간 정부 특사로 독일을 방문한다. 이를 계기로 로크는 약 10여년간 정치무대에서 활동을 한다. 처음 백작 에쉴리(Ashley)의 서기로 발탁되어 1675년에는 심지어 무역 식민위원회의 서기장에 임명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 로크는 심한 천식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후 프랑스의 몽펠리에르에서 약 4년간에 걸쳐 휴양 생활을 한 후 1679년 영국으로 돌아온다.
[편집] 저서
로크의 저서로는 당시 ‘새로운 과학’ 곧 근대과학을 포함한 인식의 문제를 다룬 그의 主著 <인간 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그리고 <관용에 대한 편지(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등이 있다.
[편집] 철학사상
[편집] 인식론
철학에서 로크의 업적은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만 정치사상에 미친 영향은 더욱 어마어마하다. 로크는 처음으로 헌정민주정치와 자연권리를 주장한 사람이다. 그의 정치이론들은 미국,영국,프랑스 등 여러 서방국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로크의 자유주의는 미국에서는 신성시 여겨졌고 민족이론으로까지 발전되었다. 그의 사상은 미국 정치가 토머스 제퍼슨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후에 독립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로크가 프랑스에 끼친 영향은 더욱 엄청나다. 로크의 사상이 프랑스에 전해진 후, 그의 사상은 훗날 프랑스 계몽주의 운동, 프랑스 대혁명등의 대사건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편집] 정치철학
로크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정치적인 존재( 고대의 인간상. 아리스토텔레스 비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신이 주어진 정당함에 따라 공평하며, 권리가 있는데 그 것은 바로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과 비교되는 로크의 주장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자연상태에의 인간의 소유는 이웃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는 상충되게, 로크는 인간은 일을 통하여 신이 주신 자연을 주변 사람의 동의 없이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유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라 함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소유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령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혼자 먹을 만큼 이상의 사과를 얻어 그 사과를 썩게 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법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여기서 남은 잉여생산물에 대한 물물교환이 생겨나며, 그 물물 교환을 간편하게 하기 위해서 돈이 발명되었다. 금 , 은 돈과 같은 것들은 썩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 법칙을 어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재산을 증식할 수 있었다. 로크는 또한 자연속에서 자연법칙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자유를 누를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며, 내 재산이 도난을 당했을 시에는 도둑에 대한 처벌을 할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재산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다른 어떠한 기관이 필요하였는데, 그 기관을 만들기 위한 중간과정이 바로 사회계약설이다. 사회계약설에 의하여 국가는 성립되었으나 국가는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이 아니며, 홉스의 국가관과 대조, 입법부가 정한 법에 의해 행정부에서 통치되는 기관이였다. (완벽한 삼권분립의 형태가 아님) 국가는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경우, 국민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 계약을 성립한 국민에 의해 파기될 수 있다는 것도 로크의 주장에서 주목 할 만하다.
[편집] 읽어보기
저서
[편집] 참고문헌
- 김용무, 존 로크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 박성균, 영국시민정치이론의 형성에 관한 연구: 로크의 시민정치이론을 중심으로, 동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0
- 최현아, 존 로크의 자연법론의 전개과정과 통치론, 경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 박양규, 존 로크의 인간오성론에 있어서의 관념에 관한 고찰, 전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 문수진, 로크의 재산권 이론에 관한 연구, 경성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